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느냐고 무례한 관심과 위로를 건넬 뿐이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의 제목을 마주했을 때, 나는 리모컨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가치함'. 누군가 내 마음속 깊은 곳, 결코 열어서는 안 될 서랍을 허락 없이 열어젖힌 것 같은 뜨끔함이 몰려왔다. 2020년 그 지독했던 여름 이후, 내 삶을 정의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무가치함은 거창한 철학적 고뇌가 아니라, 아들이 쓰러지던 그 찰나의 공기 속에 있었다. 건강하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을 때,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누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아이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구급차에 올라타며 챙겨 들었던 아이의 휴대폰과 낡은 슬리퍼. 그 가벼운 물건들의 무게가 온 생애를 짓누르는 무게로 느껴지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목숨 앞에서는 엄마라는 이름도, 그 어떤 지극한 사랑도 끝내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은 시간이 지나도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활의 가장 평범한 순간마다 불쑥 올라와 나를 무너뜨렸고, 그 압도적인 무력감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사람처럼 여기며 살았다.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를 통해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그려왔다. 그녀의 세계 속 인물들은 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거나, 혹은 무언가에 짓눌려 숨을 헐떡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박해영의 세계에서는 늘 '어린 자녀'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싱글이거나, 부부가 등장해도 아이는 아예 없거나 이야기의 중심에서 조용히 비켜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은 번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졌지만, 아들은 멀리 유학을 떠나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나의 해방일지>의 염 씨 삼 남매 역시 부모와 함께 살지만, 그들의 삶 어디에도 다음 세대에 대한 돌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신작 <모자무싸> 속 고혜진(아지트 주인) 역시 남편 박경세의 철없는 시행착오를 온몸으로 견뎌내지만, 그 고단한 돌봄의 대상은 자식이 아니라 오직 남편이라는 '큰 아들'뿐이다. 작가는 어쩌면 부모 자식 간의 본능적인 애착을 연인이나 형제 사이의 '대안적 연대'로 보여줌으로써, 결핍된 성인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엄마들이야말로 박해영 작가가 가장 사랑할 법한, 혹은 가장 다루기 두려워할 법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쉽게 지치고 가장 자주 외롭고 가장 오래 자기 자신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
엄마와 주부로 살아가는 시간 동안 무가치함과 무력감은 늘 내 삶 가까이에 있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였는데도 저녁이 되면 남은 것은 설거지 더미와 지친 몸뿐인 날들. 가족을 위해 온 시간을 쏟아붓고도 정작 내 이름으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기분. 엄마라는 자리는 이상하게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가장 쉽게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자식을 잃었을 때, 그 감정은 마침내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나를 끌고 내려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 것 역시 엄마라는 자리였다. 아니, 어쩌면 엄마라는 책임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영영 드러누운 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세상이 무너졌다고 식음을 전폐한 채 사라질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고 학교에 가야 했고, 엄마가 필요했다. 슬픔은 거대했지만 삶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엄마들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울다가도 밥을 한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도 아침이면 도시락통을 꺼낸다. 속이 무너져내려도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면 일단 대답부터 한다. 자기 몸이 아픈 날에도 아이 체육복은 챙기고, 냉장고 반찬통을 채우고, 빨래통을 비운다. 엄마들은 자주 지치고 자주 외롭고 자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하루가 자기 손끝에 달려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린 자식의 돌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현실이다. 낭만이나 감성으로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 속에서 마냥 자신의 무가치함에만 빠져 있을 수가 없다. 적어도 아이에게 엄마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스스로를 실패한 인간처럼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남은 아이들의 삶 속에서 나는 여전히 엄마였다. 여전히 밥을 차려주는 사람이었고, 밤늦게 돌아오는 아이의 불 켜진 집이었고, 속상한 날 가장 먼저 찾는 목소리였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때로 버거웠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드라마 <모자무싸> 속 인물들은 이제 막 자신의 무가치함을 마주하고 싸움을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각자의 우물에서 튀어나와 서로의 손을 잡고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박해영 작가가 이번에도 아름다운 연대로 우리를 위로할지 궁금해진다. 나 역시 내일 아침, 다시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르며 그들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삶은 자주 우리를 무가치하다고 속삭이지만, 그 속삭임을 뚫고 다시 불을 켜고 밥을 하고 하루를 살아내는 반복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가장 조용한 증명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