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07/09/18  

장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맞이하는 첫 장마.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도 있고 소나기처럼 퍼붓다가 거짓말처럼 땡볕이 내리쬐는 날도 있다. 도시 전체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하고 엄마들은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푸념하고 직장인들은 출퇴근 전쟁이 더 힘들어졌다고 한숨 쉰다.

 

비가 참 그렇다.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비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운치 있는 모습에 감수성이 충만해지지만 비가 많이 오거나 길게 오거나 하면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른들은 불편하고 싫은 것들 투성이지만 아이들은 비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하긴 어린 시절 나는 엄청난 폭우로 전교생이 조기 귀가 처리되는 순간에도 친구들과 우산 쓰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얼마나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던가!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로 돌아와 살고 있는데 이 동네는 한강에 가깝고 지대가 낮아서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면 수해 지역으로 손꼽는 지역이었다. 며칠째 비가 끊이지 않던 어느 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큰일이 생겼다며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절대 혼자 가지 말고 두세 명씩 짝을 지어 함께 집으로 가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그저 재미있는 미션쯤으로 넘기며 수업이 일찍 끝난 것만 신이 났었다. 하지만 이날 아버지와 오빠는 거의 헤엄치다시피 흙탕물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왔고 수많은 수재민들이 우리 학교로 대피하며 일주일 간 휴교한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모든 대중교통이 일시 중단되고 지하뿐 아니라 1층까지 차오른 비로 주민들은 스티로폼 나룻배를 만들어 이동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흙탕물로 온갖 살림살이가 떠내려가는 처절한 모습도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동네를 설명할 때  ‘아 왜 그때 물에 잠긴 동네있잖아요……’하면 알 정도로 꽤 오랫동안 이 동네는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수해 지역이라는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지만 90년 마지막 물난리 이후 절대 잠기지 않는 폭우 안전 지대가 되었다고 한다. 자연재해 위험지구로 지정해 적극적으로 방재 예산을 끌어들여 배수관을 확장하고 물이 차지 않도록 배수로를 설치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이후로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물난리 한 번 일어난 적이 없다곤 하나 이상하게도 이곳 토박이들은 집중 호우가 쏟아질 때면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인다고들 한다. 요즘 어린 사람들이나 타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오래 전 수해가 남긴 상처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날, 우리 아이들에게 그 옛날 물난리 이야기를 들려주니 세상 공감 못하는 표정들이다. 한국전쟁 이야기 들을 때 내 표정이 딱 이랬을까?

 

그나저나 오늘도 몹시 덥고 습하다. 작년 여름은 비가 별로 오지 않아 걱정이었다는 말들도 하던데 올해는 제법 장마가 제 구실을 할 모양이다. 비가 오면 축축하고 비가 멈추면 끈끈하다. 찬물로 샤워하고 가만히만 있으면 안 덥다는 엄마 말씀도 통하지 않는 끈끈하고 눅눅한 장마철 무더위다. 가만히 있어도 콧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린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땀띠가 나기 시작했고 전기세 폭탄을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에어컨 파워 버튼을 누르고 만다. 조만간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가 될 것이라는 말들이 어쩌면 허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 장마 속에서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폭우를 뚫고 갈 길을 재촉하고 무더위에도 불 앞에서 국을 끓이고 어른들은 걱정하고 아이들은 물웅덩이로 뛰어든다. 이렇게 첫 장마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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