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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원의 집
08/03/26  

어릴 적 내가 가장 입고 싶었던 옷은 공주 드레스가 아니었다. 미국 TV 시리즈 "초원의 집"에 나오던 잔꽃무늬 원피스였다. 바람만 불어도 치맛자락이 살짝 부풀고 소매 끝에는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초원의 햇빛과 묘하게 잘 어울리던 그 드레스를 입고 달리는 로라를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자라던 내게 그 드라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그려 보게 한 이야기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햇빛에 반짝이던 개울,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통나무집과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오던 마차. 얼마나 좋아했는지 초등학생 때는 초원의 집을 흉내 낸 동화까지 썼다.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예쁜 원피스를 입고 초원을 뛰어다녔던 것만은 또렷하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새롭게 만든 초원의 집을 보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이상하게도 몇 편 지나지 않아 다른 작품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이름과 익숙한 가족인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알고 보니 이번 작품은 1970년대 드라마보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원작 소설에 훨씬 가깝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익숙한 가족의 온기 뒤에 가려져 있던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거친 생활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착해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계절을 견디며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사실 이야기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나였다. 어릴 때의 나는 로라만 따라다녔다.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들판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다. 넓은 초원은 자유로워 보였고, 마차는 낭만적이었으며, 통나무집은 동화 속 집 같았다. 그 나이의 아이가 그렇듯 풍경은 눈에 담았지만, 그 풍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로라의 아버지는 나무를 베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다. 어머니는 아직 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공간을 가족이 살아갈 자리로 바꾼다. 아이들은 초원을 뛰어다니지만 부모는 그 초원 위에 삶을 세운다. 아이들이 들판과 개울을 새로운 놀이터로 받아들이는 동안, 부모는 겨울이 오기 전에 가족이 몸을 누일 집부터 완성해야 했다. 예전에는 배경처럼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번에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개척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시대는 다르지만 새로운 삶은 언제나 비슷했다.

살아갈 집을 구하고, 가족을 먹여 살릴 일을 찾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내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어야 했고, 나는 그 아이들이 안심하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에 먼저 익숙해져야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잠시 머무는 곳처럼 느껴졌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학교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 시작했고, 자주 들르는 가게가 생기고,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는 얼굴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그제야 이곳도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초원이라는 공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릴 적에는 그저 넓고 아름다운 들판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처럼 보인다. 아직 길도 없고 집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곳. 하지만 누군가는 그곳에 기둥을 세우고, 불을 밝히고, 바람을 막을 벽을 만든다. 하루치 노동이 쌓이고 여러 계절을 견디는 동안, 빈 땅은 조금씩 사람 사는 곳이 되어 간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초원 같은 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익숙한 것이 사라지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다시 세워야 할지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럴 때마다 처음부터 큰 무언가를 완성한 적은 없었다. 살아갈 집을 구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고,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낯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으면서 비로소 삶도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원 위에 집이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듯, 낯선 곳도 그렇게 조금씩 우리 삶의 모양을 닮아 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초원을 뛰어다니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그 아이가 마음 놓고 돌아올 집을 짓고 지키는 부모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드레스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제는 그 치맛자락보다 바람을 막아줄 벽과 저녁마다 불을 밝히는 창문이 먼저 보인다. 아마 나는 지금도 내게 주어진 초원 위에 집을 짓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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