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
08/06/18  

띵동 띵동 띠띠띠띠띵동

 

알림벨 소리가 쉼없이 울려된다. 전광판에서 보이는 숫자는 오전임에도 벌써 단위수가 백대다. 184, 256, 323. 알림벨 소리와 동시에 전광판에는 붉은색 숫자가 켜지면서 번쩍거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는 커진다. 일등하는 경주마의 번호와 내가 산 경주마번호를 연신 번갈아 가며 확인하는 경마장의 꾼들처럼 띵동거릴 때마다 내 번호를 확인한다. 마법을 외우듯 내가 받은 176, 176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숫자가 적힌 아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들여다 본다. 그 종이를 받았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연신 울려대는 알람벨 소리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다.

 

띵동 176.

얼른 뛰어가 내 번호를 보이고 쟁반에 숫가락과 젓가락을 올려 담고 주문한 음식들을 챙긴다. 강원도 가는 길목에 있는 가평휴게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 휴가 시즌, 유명 관광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북새통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 시즌에는 이때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들이 연출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특정 기간에 맞추어 휴가를 즐기려다 보니 유명 관광지나 휴가지로 가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차들로 붐비고, 관광지나 휴가지에 있는 숙박업소의 요금은 평소보다 2배 이상 웃돌지만 그나마도 예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에 집을 나서면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돈은 돈대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매년 같은 시기에 휴가를 사용한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남편의 휴가에 맞춰 강원도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휴가지로 가는 길에 가평휴게소에 들려 ‘휴게소 음식’을 즐기기로 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휴게소 음식이 화제이다. MBC TV의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개그맨 이영자가 거의 매회 휴게소 음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 화제가 됐는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서 유명세를 타게 됐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휴게소 음식은 왠지 모르게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영자가 이 프로그램에서 맛깔스럽게 각 지역 휴게소의 특색 음식을 설명할 때마다 오묘하게 빠져들다 못해 그 맛과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것이 학습 효과로 작용해 가평휴게소에서 음식을 기다리며 느꼈던 설렘과 긴장감을 더 유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학생 시절, 관광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지로 가는 도중 잠깐 쉬었다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는 수학여행지에서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휴게소가 가까워지면 선생님은 휴게소에서 머물 시간과 탑승해야 할 차량 번호에 대해 안내했다.

 

“다음 휴게소에서 15분 동안 쉬었다 가니 화장실 이용할 사람 이용하고 11시 30분까지 다시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2345 버스로 탑승해야 한다. 오가는 차량 주의하고 한 사람도 늦게 탑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우리에게 주어진 15분은 화장실도 가고 맛난 주전부리라도 손에 쥘라치면 절대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나름 그 시간을 최대로 즐겼다. 수학여행 간다고 아버지가 특별히 챙겨주신 푸릇푸릇한 만 원 한 장이면 나름 쇼핑도 가능한 액수라 구매할 물품과 입을 즐겁게 할 주전부리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스캔하고 너는 어묵, 나는 가락국수, 그런 다음 화장실. 이렇게 친구들과 짜는 007 작전 버금가는 휴게소 작전은 버스가 휴게소에 진입하기도 전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버스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고, 문이 열이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가 가락국수 한 사발을 획득할라치면 그 한 그릇에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 젓가락을 담궜다. 그때 그 어묵과 가락국수 맛은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 추억 속의 그 맛이 그리워 어른이 된 후 어묵과 가락국수로 유명하다는 맛집을 몇 군데 가 보았어도, 결코 수학여행 도중 휴게소에서 먹었던 그 맛을 찾을 수 없었다.

 

2018년 휴게소는 4차 산업혁명에 맞추어(?) 많은 것이 자동화 되었다. 계산은 한 곳에서 일괄 처리하고 마치 공장이 돌아가듯 주방에서 음식들이 분 단위 아니 초 단위로 찍어 나온다. 맛은 공산품처럼 대부분 기업화된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보장하는 그런 맛들이다. 여전히 지역마다 특산음식들이 있지만 요즘엔 지방 음식들을 서울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다 보니 예전보다는 재미가 덜 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휴게소를 매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러 메뉴를 살피는 건, 바로 휴게소 음식이 설레는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강원도 휴갓길 초입에서 맛보았던 가평휴게소의 잣소고기 국밥은 우리의 올여름 휴가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만들만큼 맛이 있었다. 그리고 잣이 가평의 특산물이라는 사실을 가평휴게소에 들른 덕분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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