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의 도끼
08/27/18  

며칠 전 한 모임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성직자라고 소개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지긋한 나이에도 멋진 풍채와 점잖은 행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말이 길어질수록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그에 대한 호감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말만 하고 있었다. 하는 말마다 자신이 성직자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믿는 종교의 경전에 나온 말씀을 인용해가며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을 들을수록 성스러움과는 먼 생활을 하는 우리네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하는 성질, 즉 인성(人性)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인성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전에서도 인성을 ‘1. 사람의 성품 2.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인성은 사람마다 다른 성품을 뜻한다.

 

인성은 선천적인 요인으로 결정된다는 주장과 후천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 두 주장이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모두 인성 형성에 기인한다.

 

옛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 본향(本鄕)을, 또 어떤 학교에서 수학했는가를 묻는 것도 상대방의 인성 형성 과정을 알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인성은 달리 영성(靈性)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영성의 사전적 정의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다. 이 영성도 인성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다르다.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은 보통 사람이라면 갖기 힘든 것임이 분명하지만,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영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종교인, 특히 성직자들에게 영성을 기대한다. 더 나아가 영성이 깃든 생활 모습을 보기 원한다. 단지 경전에 바탕을 둔 이론적 무장뿐만이 아니라 실천의 모습까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종교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은 더욱 정제되고 타인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가끔 확실한 믿음으로 굳건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종교만을 올바른 종교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앞선다. 과거에 이미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곤혹스러워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설사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방을 인정하는 첫 걸음일 텐데,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경계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종교를 부정하고 적대시한다면 잠시라도 함께 하기 어렵다.

 

종교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제일의 덕목으로 사랑을 강조한다. 자기애이든지 타인을 향한 사랑이든지 사랑 없인 구원도 없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나온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종교적 실천인 셈이다.

 

가끔 마켓 앞에서 피켓을 들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그들의 종교를 전도하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이 믿는 바에 따른 실천이란 점에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진정한 전도는 구호가 아닌, 일상생활 가운데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고 내 주변의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늘 남을 돕고 어려운 일에 앞장서며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종교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을 보면 그들의 종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때로는 온화한 미소가 소리 높여 외친 구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초기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

 

만일 모임에서 만났던 그분이 길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면, 참석했던 사람들과 더 친밀해지지 않았을까. 그가 믿는 종교에 대해 더 궁금해 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을까. 그랬었다면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그 날의 모임이 소중한 시간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으리라.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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