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기다리며
09/04/18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브레이크를 밟는데 갑자기 뭔가 휙 하고 차창을 스쳐갔다. 잠자리였다.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빠르게 달리는 도로 한 복판에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잠자리의 출현은 잠시나마 내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린 시절, 그 투명하고 얇은 두 날개를 하나로 접어 손가락 사이에 끼고 다니던 기억이 떠올라 입가로 얇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 간격으로 출퇴근길에 만났다. 어떨 때는 두세 마리가 동시에 차창을 스쳐 날아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 잠자리가 제법 살고 있다는 얘기다. 은근히 다시 또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 뒤뜰에는 잠자리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하는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뒤뜰에서 즐기기 시작한지 꽤 되었다. 지난봄부터니까 적어도 다섯 달은 넘었다. 뒤뜰이라고 해봐야 여남은 발자국만 옮기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거기에 오만 것들이 다 있다. 처음에 심은 세 그루와 꺾꽂이로 심은 두 그루, 모두 다섯 그루의 토마토 넝쿨이 번지고 있다. 하와이를 대표하는 꽃, 풀루메리아가 세 그루, 그리고 알로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붓꽃이 가운데 버티고 있는 형세이다.

 

토마토는 많은 열매를 맺으며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집에서 다 먹지 못하고 이웃, 직장 동료들과도 나누어 먹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토마토를 심어 놓고 말려 죽이지나 말자는 심정에서 건성으로 물을 주었으나 열매를 맺는 토마토, 꽃을 피우는 플루메리아를 보면서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 아니 하나하나 세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토마토에 물을 주는데 무언가 초록색 물체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애벌레 한 마리가 힘겹게 토마토 줄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토마토 줄기와 같은 빛깔이라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그 꿈틀거림을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자리를 옮겼다.

 

다른 생명이 있나 살펴보니 메뚜기도 눈에 띄었다. 그놈은 뒷집과 경계를 짓기 위해 쳐놓은 나무 울타리에 앉아 있었다. 몸의 색깔이 울타리 색과 흡사해 무심코 보았다가는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릴 적 우리가 송장메뚜기라고 부르던 녀석은 토마토 줄기로 옮겨 앉더니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전화기를 꺼내 꽤 오랫동안 사진도 찍고 비디오도 찍었으나 마치 모델이라도 된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동상이나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메뚜기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따따따닥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두어 달 전에 체리를 사다 먹고 그 씨 열 알 정도를 풀루메리아 옆에다 심었다. 그리고 물을 매일 주었다. 풀루메리아에 물주면서 체리 씨를 심은 곳에도 정성을 다해 듬뿍 뿌려주었다. 이번 주에 드디어 다섯 개의 싹이 올라왔다. 과연 싹이 틀 것인가 반신반의하고 있었기에 싹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주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기에 물을 주며 기다렸을 뿐인데 아주 연한 녹색의 생명들이 솟아올랐다. 이 연한 잎의 싹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까?

 

사실 이들이 체리의 싹이라는 확신은 없다. 씨앗을 심기는 했지만 다른 풀이나 잡초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기대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작은 생명들이 자라 예쁜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되는 날이 오리라 굳게 믿는다.

 

도시화, 현대화로 사람들의 감성이 메말랐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하는 곳곳에는 자연이 있다. 단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비록 작은 뜰에 불과하지만 자연이 전해 주는 평안과 가슴이 충만해지는 느낌은 깊은 숲속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뒤뜰로 나가는 발걸음이 잦아진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단지 물만 주었을 뿐인데 그들은 나에게 감정의 호사를 누리게 해 주었다.

 

창가에 초가을의 투명한 햇살이 머물고 있다. 내가 만났던 잠자리와 메뚜기는 그 햇살을 가르며 비상하고 있거나, 풀잎에 앉아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토마토 줄기를 타고 오르던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햇살에 팔랑팔랑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날다 어느 집 정원의 꽃잎에 내려 앉아 자연이 빚어 놓은 화폭 속에 화룡점정하고 있지 않을까.

 

뒤뜰의 식물들도 소리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그렇지만 부지런히 오는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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