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09/10/18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래서 가족, 이웃, 친척, 학교 동창생, 직장 동료, 그 밖의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잠시 스쳐가는 사람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그러다 보니 이해관계, 견해 차이 등으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불협화음을 예방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 규범이다. 규범은 사회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도덕이요, 윤리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가치 기준인 것이다. 하지만 규범은 법과 달라 어겼다고 해서 처벌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달 내가 사는 주택단지에서 도로 포장공사를 했다.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전 구간을 한 번에 포장하지 않고 날짜를 정해서 부분적으로 했다. 공사하는 도로에는 차량 출입을 제한하고, 공사가 끝난 지역에 차를 주차하고 통행하도록 했다. 당일 공사를 한 도로에는 차량이 통행하지 않도록 노란 줄을 쳐 놓았다.

 

내가 다니는 길을 공사했던 날, 이미 몇 주 전부터 예고했지만 깜박 잊고 늘 다니던 길로 갔다. 줄 쳐 놓은 것을 보고서 아차하고 오던 길을 돌아 나와 다른 입구를 이용해 단지로 들어갔다.

 

차를 세워두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승용차 한 대가 노란 줄을 무시하고 이제 막 공사가 끝난 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승용차가 지나간 도로 위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분명히 노란 줄을 쳐놓았고 그 옆에 통행해서는 안 된다는 표시판까지 있었지만 운전자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는 새로 포장한 도로를 조금 더 지나 차를 세웠다. 운전자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입하지 말라는 길로 운전한 사람은 젊은 아시안 여성이었다. 그를 불러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차에서 내려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뒤이어 트럭 한 대가 조금 전 젊은 여성이 지났던 막 포장한 길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도로 위에는 더욱 더 큰 바퀴 자국이 혈흔처럼 뚜렷하게 남았다.

 

비슷한 시기에 인천 송도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 차량 한 대가 방치하다시피 놓여 있어서 아파트로 차량들이 출입하지 못해 난리가 났고 SNS상으로 떠들썩해진 뒤에야 이 사실을 알아차린 차 주인이 잘못했다는 글을 올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송도에서 벌어진 일도, 내가 살고 있는 주택단지에서 일어난 일도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안타까움이 너무 크다. 다른 주민들에 대한 배려나 양보는커녕 단순한 공중 질서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공공의 안녕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신만의 영역이나 공간이 있다. 하지만 나 혼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에 부득이 다른 사람들과 상호의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공공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공공은 물론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아파트나 주택 단지라면 공공질서 준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규정한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한 모든 불편과 고통은 구성원 각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했던 공리주의의 시조 벤담은 도덕의 목적이 행복 증진에 있다고 하면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을 조화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개개인의 행복이 사회 전체의 행복과 합치되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공중질서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를 지키고 따르는 것으로부터 그 사회의 행복은 시작된다고 역설했다.

 

벤담의 뒤를 이어 공리주의를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은 바로 개개인의 이기적인 만족이 앞서는 것을 경계하여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하였다. 즉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개인은 다소 불만족하더라도 질서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21세기에 무슨 19세기적 이야기를 하냐고 손가락질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를 뛰어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이 구별 없이 뒤섞여 하루가 다르게 변화 발전하는 작금의 세상에 더 필요한 말씀인지도 모른다.

 

배부른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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