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09/10/18  

내 인생 첫 심부름은 무엇이었을까? 엄마 흰머리를 뽑기? 아빠 안마 해주기? 빨래개기? 곰곰히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고사리같은 손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집 근처 슈퍼 심부름, 설거지, 식재료 다듬기 등으로 심부름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해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는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내가 이런 고리타분한 표현을 자주 하게 될 줄은 몰랐음) 정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어릴 때와 비교하면 심부름 능력 레벨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다른 집들은 더 심한 수준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매일 아침 아이가 입을 옷을 골라주고 샤워를 시켜주고 밥을 다 먹을 때까지 한두 시간씩 자리를 지켜주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주위에서 너무 흔해 특별할 것도 없다. 그렇다 보니 자녀가 많지 않아도 엄마들의 어깨가 무겁고 육아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자주 들었지만 한국에 와서는 지나가는 사람도 멈춰서게 만드는 애 넷인 우리집. 만나는 사람마다 “네에? 아이가 네 명이요? 어머나 힘드시겠어요.”, “아이 넷을 어떻게 키우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신기함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이 한두 명 키우면서도 허리가 휘는 엄마 입장에서 보면 신기할 만도 하지만 아이가 이렇게 많으면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일단 우리 집은 식구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나 혼자 오롯히 일 폭탄을 맞아야 하는 실정이다 보니 남녀노소, 너나할 것 없이 각자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

 

5학년인 첫째 아들은 매일 아침 등교 전에 밖에 나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서 나오는 각종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주변에서도 초등학생 혼자 이런 심부름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해서 본인도 가끔은 어깨를 으쓱 하는 눈치다. 얼마 전 학교 전교 임원에 출마했을 때도 본인이 얼마나 준비된 리더인지 설명하는데 네 남매 중 장남으로 온갖 집안 일을 맡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어필하기도 했다.

 

2학년인 둘째 딸은 식사 후 식탁 닦기, 매일 아침 막내 동생 옷 골라주기와 샤워시키기 담당이다. 식탁을 완벽하게 닦아내지는 못하지만 처음보다는 확실히 실력이 향상되고 있어서 앞으로 더 기대가 크다. 최근에는 본인이 자원하여 설거지와 세탁기 돌리기에 도전하여 몇 번의 연습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여자의 섬세함으로 엄마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도 솔선수범하고 있다.

 

1학년인 셋째 아들은 식사 전 수저 놓기(얼마 전까지 누나가 하던 일을 인계 받음), 현관 신발 정리 담당인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임무를 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유일한 녀석이다. 다른 아이들에게 통했던 것처럼 이제 네가 집안일을 도울 정도로 컸으니 얼마나 좋냐며 부추기고 설득해도 그다지 동요되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도 제일 설렁설렁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신발 정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막내는 그 동안 막내 특혜로 편히 지내다가 최근 소파 쿠션 정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아침마다 쿠션 정리하라고 시키면 자기 몸집보다 큰 쿠션들을 나름 생각해서 배치하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기저귀 졸업한 게 엊그제 같은데 할 줄 아는 게 하나 둘 늘어가는 막내를 보고 있으면 그 위로 애를 셋이나 키워봤는데도 그저 신통방통 대견하다.

 

이렇게 아이들이 크니 제법 심부름 시키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농사 짓던 옛날에는 일손이 필요해 애를 많이 낳았다더니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 심부름 시킬려고 아이 많이 낳으라고 했다가는 질타를 피해갈 수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육아가 힘겹고 우울한 엄마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아이들에게 심부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라고. 아이가 해 내지 못할 거라고 과소 평가하지 말고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맡겨보라고. 어느새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도, 해 내는 아이도 점점 같이 성장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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