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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으로
10/08/18  

7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 이종국을 찾았다. 친구가 잠들어 있는 공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울긋불긋 예쁜 물감으로 채색된 가을나무들이 반겨 주었다. 동승한 김 장로와 내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나왔다.

 

“아 가을이 완연하네.”

“여기 가을이 와있구먼.”

 

운전하고 있던 김 장로 부인도 한 마디 했다. “어찌 이렇게 예쁘게 가을물을 듬뿍 머금고 있을까요.”

 

어제 찾았던 아차산에서도 지난 주에 올랐던 도봉산에서도 또 그 전 주에 걸었던 청송 주왕산, 여수 금오도 둘레길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가을색이었다. 이종국은 아름다운 가을의 한가운데 머물고 있었다.

 

아름다운 가을 정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친구가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종국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5년 전에 김 장로와 함께 오늘처럼 그의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었기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종국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을 뒤로하고 떠난 수많은 자들이 산 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처럼 단지로 나뉘어 그 단지 안에 동과 층과 호로 나누어진 곳에 머물고 있었다. 사무소에 들려 친구가 잠들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검은색 바탕에 희미하게 적힌 조그만 이름표 하나뿐이었다. 거기에는 이름과 함께 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종국은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던 중에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했으며 대위 전역 후에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30대 후반부터는 농사를 지었다. 20여 년을 농부로 살다가 환갑을 한해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함께 간 김 장로 이름도 종국이다. 김종국에게 고 이종국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두 종국이와 나는 졸업 후에도 자주 어울렸다. 대학 시절 우리 세 사람은 김종국이 집에 놀러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 자고 오기도 했고, 김종국이 사업에 실패해 반지하에 셋방살이할 때 그 반지하 방에서 고스톱도 치며 어울렸다.

 

또 옛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녹음기처럼 만날 때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말하고 듣는다.

 

대학 졸업 후 몇 년쯤 사회생활을 하고 저마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어느 해 가을인가 나와 이종국 둘이 북한산에 간 적이 있었다. 정상에 올라 버너를 켜서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해 먹으려는데 종국이 배낭에서는 소주병만 나왔다. 한 병을 마시면 두 번째 병이, 그 병에 담긴 소주를 다 마시면 세 번째 병이...... 먹어도 먹어도 그치지 않고 술병은 계속 나왔다. 안주 겸해 먹던 밥과 찌개가 동나자 우린 깡소주를 마셨다. 내가 가져갔던 소주도 두 병이 있었으니, 우린 꽤나 마셨지만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산에 올라 술을 마신다는 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상주라는 이름으로 술을 마시곤 했다.

 

우린 자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다 가끔 대학 졸업 후 출가한 여자 동창생 본각스님을 찾아가기도 했다. 본각스님은 술에 취해 찾아오는 친구들이 귀찮을 법도 했지만 언제나 따뜻한 차를 대접했고, 여러 가지 삶의 때가 묻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이종국은 본각스님을 가끔 찾았고, 스님은 친구의 고달픈 삶에 힘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술로 인한 병에 걸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이름표 위에 예쁜 꽃을 사다 달아 주었다. 그리고 준비해온 소주를 따라 김종국과 나누어 마셨다. 우리가 마신 건 분명 소주인데 몸은 어느덧 가을로 물들었다. 빈 술잔은 가을 색으로 넘쳤다. 그 가을 속에서 이종국이 나를 바라보며 내 인생의 화려한 가을을 당부하고 있었다. 건강한 겨울을, 아름다운 황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방은 적막하고 세상을 온통 가을빛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함께 그 속으로 걸아가고 있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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