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10/08/18  

생태계 훼손과 극심한 오염으로 지난 여름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던 세계적인 휴양지 태국의 피피섬 마야 베이가 완벽한 복원을 위해 무기한 폐쇄된다고 한다. 이곳은 2000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더 비치”의 촬영지로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찾던 마지막 남은 지상의 낙원으로 묘사된다. 지상낙원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을 갈망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결국 이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지만 피피섬을 지상낙원으로 알리는 1등 공신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피피섬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 때문에 논란도 많았던 모양이지만 영화 제작사에서 원상복구를 약속하고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촬영을 위해 해변의 야자수를 블도저로 밀어내는 등 심각한 훼손을 입혔다고 하지만 영화 개봉 이후 유명세를 떨치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꽃미남 디카프리오가 에멜랄드빛 피피섬과 한몸이 되어 손짓하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며 피피섬으로 이끌었다.

 

당시 20대였던 나 역시 이 영화의 영향으로 신혼여행을 피피섬으로 다녀왔는데 아직도 그곳에서 봤던 에메랄드빛 바다를 잊지 못한다. 아름답지 않은 바다가 어디 있을까마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바닷물빛으로 나는 주저없이 피피섬을 손꼽는다. 어쩌다가 그때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면 여전히 지상낙원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고개를 돌리면 돌고래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헤엄치고 바닷속으로 얼굴을 담그면 마치 아쿠리아움 수족관처럼 산호초와 형형색색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다. 섬이란 특성 때문이었는지 태국의 다른 바다와 달리 한가롭고 고요하기까지 해서 머무는 내내 이곳에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그 아름다운 섬에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200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던 12월 26일, 전 세계의 아침을 흔들어 깨운 인도양 쓰나미가 피피섬을 집어 삼킨 것이다. 그렇다. 피피섬 건물의 70% 이상이 파손되고 850명의 시체가 발견되고 여전히 천여 명이 실종이며 백여 명의 살아남은 어린이가 부모를 잃었던 그 악독했던 쓰나미였다. 쓰나미의 위력에 우리 모두는 참으로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 아름답게 빛나던 청정한 바다와 눈부신 하늘이 대재앙 앞에 마치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뀌어 있었다.

 

피피섬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의 얼굴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서툰 영어로 사람좋게 웃으며 우리를 배에 태워 스노클링 하기 좋은 라군으로 데려가 주었던 그였다. 수면 위로 돌고래가 나타나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 듯 알려주고 스노클링 중에 바닷속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소라를 따서 우리 손에 쥐어 주던 사람. 그의 전부였을지도 모르는 피피섬에서 그가 쓰나미 속에 휩쓸려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실시간 보도되는 쓰나미 보도가 그저 먼 나라 남의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우연히 나처럼 쓰나미가 일어나기 하루 전에 피피섬을 떠난 이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 사건을 인생의 새로운 시작, 다시 얻은 인생, 기적이라 정의하고 있었다. 신이 허락하신 또 한 번의 삶으로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사실 처음 신혼 여행 일정을 계획하며 하루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천주교인으로 성탄 미사는 빠질 수 없어서 최종적으로 마지막 하루를 포기했던 것이 내 인생을 바꾼 것이다. 살아 남아 피피섬 기사를 다시 접하고 있으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섬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기적같았고 공포의 대재앙 속에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피피섬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 기적과 같다.

 

나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던 피피섬의 폐쇄 소식을 접하며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안도의 마음도 생긴다. 기적의 지상낙원으로 기억되는 피피섬이 자연 재해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몰아닥친 인류 쓰나미, 인재만큼은 꼭 막아내길 기원한다. 한 사람, 한 가정의 전부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에멜랄드빛 섬을 꼭 지켜내어 또 다른 기적이 되어주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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