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10/15/18  

김밥이 흔해빠진 요즘이다. 동네 분식점이나 편의점, 김밥 전문점 등 어디를 가도 김밥을 먹을 수 있고 김밥 한 줄에 2-3천 원 정도로 다른 음식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보니 김밥은 더 이상 특별한 음식이 아니다. 그래도 밥이라는 생각에 한끼 급히 때워야 할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김밥인데 우리 아이들은 애석하게도 김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때 김밥은 소풍 날이나 생일날에만 먹던 그야말로 특별한 음식이었는데 말이다.

 

김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소풍, 소풍날이면 엄마는 새벽부터 김밥을 만드셨다. 이른 아침,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김밥 써는 소리가 들려오면 깨우지 않아도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엄마 옆에 붙어 속 재료가 삐죽삐죽 튀어 나온 김밥 꽁다리들을 집어 먹었다. 고슬고슬 고소한 밥알에 김, 소시지, 단무지, 시금치, 달걀, 당근, 우엉이 어우러지는 맛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김밥은 이렇게 만드는 즉시 집어 먹는 끄트머리가 제일 맛있다. 소풍날은 아침으로 김밥을 먹고, 소풍 가서 김밥 먹고, 집에 돌아와서 또 남은 김밥 먹는 그야말로 원없이 김밥을 먹는 날이었다.

 

그리고 또 김밥을 맛볼 수 있는 날은 바로 생일날이었다. 엄마는 생일상에 꼭 김밥을 올려주셨다. 다른 음식들은 해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김밥만큼은 매년 케이크처럼 가지런히 쌓아 올려져 있었다. 마치 생일상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메뉴와도 같았다. 생일상 위에 흐트러짐없이 가장 화려하게 올라온 김밥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중 행사처럼 먹는 김밥을 매주 도시락으로 싸 오던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그 당시 국민학교) 3학년 때 내 짝꿍이었는데 매주 목요일마다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왔었다. 소풍날이 아닌데 김밥을 매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부유함의 상징 그 자체이기도 했고 다들 김밥용 햄이나 소시지가 들어가는 김밥을 먹던 그 시절 그 친구의 김밥에는 꼭 간이 맛있게 된 소고기가 들어있어서 이 도시락은 모든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짝꿍에게 소고기 김밥 하나씩 얻어먹을 수 있던 목요일을 나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올가을 소풍날, 작년 가을 소풍 때 약속했던 대로 (작년 칼럼 57호 “가을 소풍”) 아이들을 위해 김밥을 쌌다. 소풍날 내 손으로 처음 만드는 김밥이었다. 미국에서는 소풍날 김밥을 쌀 일이 없었고 작년에는 생각만해도 번거로워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집 앞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서 싸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아이들은 당근, 시금치 등이 잔뜩 들어간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스팸과 단무지만 들어가는 김밥을 선택했다. 재료가 간단하다지만 김밥 말기는 역시 쉽지 않았다. 보고 배운 대로 조심조심 말았건만 번번히 찌그러지거나 내용물이 정가운데로 가지 않고 옆으로 쏠리거나 했다. 여러 개 만들어서 예쁘게 나온 것만 도시락에 담아 주었다. 소풍날 아침 고슬고슬 참기름으로 풍미를 더한 밥에 하나씩 따로 썰고 볶은 속재료들을 올리는 엄마의 손길은 언제나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는데 나는 허둥지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요즘 엄마들은 더 이상 번거롭게 김밥을 말지 않고 아이들은 더이상 김밥을 특별한 음식으로 손꼽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김밥 그 자체보다는 김밥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소풍날이나 생일날 엄마 옆에서 집어먹던 그 맛있던 김밥 꽁다리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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