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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
10/22/18  

초등학교 (국민학교) 때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성당을 다녔던 친구 두 명을 만나기로 했다. 한 친구가 가평 대성리 쪽에 살고 있어서 모처럼 단풍 구경도 하며 가을을 느껴보자 하여 사당에서 오는 친구를 잠실에서 만나 광역 버스를 타고 대성리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무척이나 설렜다.

 

어릴 적 친구들이지만 내가 미국에 간 이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소식을 전했었다. 비록 몸은 태평양 건너 멀리 있었지만 미국살이의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가슴 절절했던 첫사랑의 아픔, 모든 연애사와 가족사까지 속속들이 공유하며 함께 어른이 되어간 친구들이다. 그래서 굳이 매일 연락을 하지 않아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어제 만나고 헤어진 친구들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다.

 

우리 셋은 대성리 버스 종점에서 만나 길 건너 순댓국집에서 마치 해장 하는 아저씨들처럼 아침 겸 점심으로 순댓국을 한 그릇씩 싹 비웠다. 그리고 디저트는 그 앞 편의점에 들려 해결하기로 했다. 한 친구가 음료를 고르는 동안 나는 편의점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있는데 다른 친구가 유심히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뭐라도 묻었나?’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놀란 듯이 “어머! 너 흰머리!" 하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얼른 솟아오른 굵은 흰머리카락 하나를 잡아 올렸다. 그러더니 "어머 얘, 너 하나둘이 아니야. 여기도 저기도 많다 많아." 하며 놀라움과 웃음이 뒤섞인 얼굴로 내 머릿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금새 흰머리를 몇 개씩 뽑아내는 친구만큼이나 거울에 비친 중년의 내 얼굴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편의점을 나와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 산은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들은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 각자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가을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은은한 나무 향기와 흙내가 코끝을 자극하니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걷다가 잠시 강이 보이는 산책로에 앉아 이제 막 붉게 물들어 가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오기 전 가장 멋스럽게 옷을 갈아입은 가을 나무들이 나에게 중년의 삶을 준비하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낙엽으로 지기 전, 다시 한번 고귀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이다.

 

초등학교 때 만난 30년지기 친구들과 나는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중년이 되어 서로의 흰머리를 바라보고 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싱그러움은 지난 세월과 함께 우리를 떠났지만 시리도록 푸르던 지난날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마음의 평온이 조금씩 자리해가고 있었다.

 

산책로를 벗어나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각자의 집으로 떠나며 오늘도 소중한 추억 하나가 또 생겼구나 싶어 참 감사했다. 그리고 갑자기, 흘러간 30년보다 앞으로 다가올 30년이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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