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홈으로 나는야 1.5세 아줌마
이웃
11/12/18  

나에게는 “한 지붕 세 가족”이나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 속에 나오는 끈끈한 이웃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누어 먹고, 요리하다가 재료가 떨어지면 빌리러 가고, 도움이 필요하면 서로 품앗이를 해주고, 힘들 때 열일 제쳐두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같은 이웃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이웃은 바란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국 유년 시절 난 늘 아파트에만 살았고 부모님도 이웃들과 친분을 두고 왕래하는 타입이 아니셔서 이웃사촌을 가져 볼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아파트에서는 옆집, 윗집, 위에 윗집도 모두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어울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미국에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와 주지 않았다. 신혼 때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이웃들이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고 처음으로 장만했던 집에서는 이웃집 사람들이 자주 바뀌어서 친해지기는커녕 서로를 알아갈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꿈꾸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이상적인 이웃은 점점 멀어져 가는 듯했고 나도 더 이상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한 동네에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부담없이 오갈 수 있는 이웃 하나 없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감 나와라 배 나와라” 오지랖 떠는 이웃도 없었고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현실을 수용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에 다시 오게 되었다. 처음 6개월은 사사건건 시시콜콜 미국과 비교해가며 한국의 안 좋은 점들을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한숨부터 밀려왔다. 한파가 끔찍했던 지난 겨울에는 일주일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아이들은 코앞 학교에 다니고 온갖것들을 배달해주니 딱히 내가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그렇게 봄을 맞고 아이들이 새 학년을 시작했을 무렵 나에게도 한 명 두 명 인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해서 같이 장도 보고 밥도 먹는 사이가 되었고 기분 꿀꿀한 날 집앞 치킨집에서 맥주 한 잔 하자면 달려 나오는 사람도 생겼다. 놀이터 정자에 같이 앉아주기도 하고  제철 과일이나 시골에서 올라온 야채나 곡물 등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대신 아이를 픽업해주기도 하고 짜증나는 일을 당하면 옆에서 더 크게 성을 내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외출 후 택시에서 내리는데, 도대체 어디서 날 봤는지 ‘어디 갔다와?’하는 문자가 날아오기도 했고 동네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으면 반드시 아는 사람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이웃들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일주일 스케줄이 빼곡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바라고 부러워했던 이웃을 갖게 되며 내 한국에서의 생활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고 그저 나에게 이웃이 생긴 것뿐인데 말이다.

 

이웃사촌은 옛말이 되어버린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이웃”, “우리”같은 단어가 소멸되어 버린 삭막하고 이기적인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싫든 좋든 끊임없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며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인싸(뭔지 모르면 옛날사람)도 아닌 내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우리집 셋째가 학교에서 일기장을 왜 안 가져 왔는지 어제 사라져버린 양말은 어디 있었는지 시시콜콜한 나의 흔한 일상에 눈을 반짝이며 귀 기울여 주는 이웃 덕분에 나의 하루는 더욱 특별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있기에 한국에서 맞을 두 번째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빼곡히 채워진 내 스케줄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빼곡히 감사의 마음으로 풍성히 채워질 것이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