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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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전
11/19/18  

여권을 챙긴다. 여권 분실을 대비해 복사본을 챙긴다. 여권 복사본마저 분실 시 사용할 수 있도록 여권번호를 수첩 한 귀퉁이에 메모해 둔다. 이것들을 동시에 분실할 경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캐리어 가방, 백팩, 그리고 복대에까지 나누어 보관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눈을 감고 모든 루트와 일정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2번 출구에서 나와 300미터를 걸어가 좌측으로 병원이 있고 그 맞은편에 있는 호텔이 오늘 나의 숙소. 만약 만실이면 우측으로 500미터 이동하면 리뷰는 좀 별로지만 그래도 하룻밤 지친 육신을 쉬어가기에는 충분한 또 다른 숙소가 있다. 이 또한 만실이면 도시 B로 이동한다. 샤워는 반드시 2층 샤워실 세 번째 칸을 사수해야만 양호한 수압의 샤워를 즐길 수 있다. 아침은 C 마트에서 식빵으로 점심은 D 식당에서 해결하고 잠은 국경을 건너는 야간열차에서…... 여행 코스는 시간, 아니 분 단위로 빈틈 없이 짜여지고 만약을 대비해서 플랜 B, 아니 서너 가지의 수를 더 예상해 놓는다. 인터넷을 쓰려면 컴퓨터가 필요했던 시절. 인터넷에도 모든 정보가 없던 시절, 로밍이나 와이파이 대신 공중전화와 전화카드가 필요했던 시절, 스마트폰 대신 가이드북과 지도를 목숨처럼 챙겨야했던 시절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더욱 더 철저히 계획하고 또 준비해야만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원래 그랬던 것 같다. 늘 계획의 여왕이라 불리며 철저하게 여행을 준비했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은 갈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즐겁다고. 나도 늘 그랬다. 여행지 선택에서부터 오랜 시간 고심했고 신중했으며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을 빠짐없이 기록하며 코스를 계획했다 변경했다 취소했다 다시 수정했다를 수십 번도 넘게 반복했다. 그에 맞게 동선을 짜고 메모를 하고 남들의 의견도 묻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올려놓은 리뷰를 읽고 또 읽었다. 

 

대학생 때 떠났던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자그마치 내가 일 년을 계획하고 준비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파트타임으로 열심히 일하며 여행 자금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 정말 수험생 공부하듯 닥치는대로 유럽 여행 관련 자료들을 섭렵했다. 틈만 나면 가이드책을 읽으며 여행 루트를 세웠고 다른 이들의 여행 후기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나의 준비 능력은 신혼여행을 준비하며 초절정에 이르는데 준비한 자료가 7센티미터 폴더를 꽉 채웠다. 패키지 없이 자유여행으로 떠난 신혼여행의 스케줄, 호텔, 식당, 관광 코스를 수개월에 거쳐 혼자 준비하다보니 남편은 우리가 어딜 가게 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신혼여행 내내 여행 가이드 쫓아 다니듯 천진한 얼굴로 나에게 “이제 어디가?” 라고 묻기도 해서 몇 번 얄미운 눈총을 사기도 했었다. 아무튼 철저한 준비 덕분이 신혼여행 다녀온 후 약 3년간은 그 누구보다도 태국을 잘 알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여행 상담을 해주고 제안을 할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열 시간 후면 부산 가는 SRT (수서발 고속 열차)에 오른다. 몇 달 전부터 계획된 여행이었는데 아무 것도 준비 하지 않았다. 아이들 없이 친구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라고 그렇게 좋아하고 기대해 놓고 정작 기차 예약을 마친 후에는 정말 여행에 대한 생각은 모두 접고 바쁘게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여행 떠나는 날이 오고 만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어떤 계획도 짐도 싸여 있지 않다. 물론 이 글을 마무리하고나면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아침에 애들을 챙겨 등교 시키고나면 내가 가진 여행 준비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다. 그럼에도 별 걱정 없이 이렇게 천하태평이다. 국내여행이라 그런가?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런가? 꼭 봐야할 것도 꼭 먹어야할 것도 없어서 그런가?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들어서? 

 

아마 여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다 가는 곳을 못 가도, 남들이 다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해도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바람이 좋고 냄새가 향기로우며 마음이 흐뭇한 그리고 내 옆이 든든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여행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예고 없이 찾아드는 계획에 없던 만남과 에피소드들이 여행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여행 떠나기 전 찾아오는 설레임을 품고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들을 기대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의 준비는 끝났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지금, 나는 오히려 평온하다. 이제 그렇게 수많은 날을 공들여 준비하지 않아도 나는 두렵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 자, 이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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