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11/26/18  

아름다운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질 무렵, 으슬으슬 이제 제법 추워졌다 싶으면 바야흐로 김장철이다. 요즘에는 김장 안 하는 집도 제법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은 김장철이라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다. 동네 야채 가게에는 쭉쭉 뻗은 쪽파와 배추만큼 큰 무우, 토실토실한 생강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김장을 앞둔 어머니들은 질 좋은 고춧가루며 젓갈을 준비하며 거사를 도모한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네 식구 살림에 비해 김장을 크게 하셨다. 네 식구 먹을 양 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었는데 아무도 부르지 않고 늘 혼자 후딱후딱 해치우셨다. 딱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지만 혼자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며 한 해도 거르지않고 참으로 억척스럽게 김장을 해내셨다. 요즘에야 다들 절인 배추를 주문 배달해서 사용하지만 그때는 배추 절이는 일부터 중노동이었다. 작은 체구의 엄마가 그 커다란 배추들을 손수 나르고 욕조에 담가 밤새 왔다 갔다 하시며 배추를 뒤집고…… 그때야 내가 어렸으니 엄마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참 젊고 겁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저 엄마 곁에 앉아 노랗고 싱싱한 배추 속잎에 김치소를 넣고 둥글게 말아 입안에 가득 물고 달큰하고 싱싱한 맛을 느끼는 것이 행복해서 김장 날이 좋았던 것 같다.

 

한국에 오면서 나도 본격적으로 시댁 식구들과 함께 김장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는 11월 말로 김장 날짜를 잡았더니 배달 온 절인 배추가 살짝 얼어 김치 곳곳이 물러 낭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어머니가 살짝 날짜를 서둘러 잡으셨다. 시누이는 매년 직장에 휴가를 내고 김장에 참여하고 시어머니의 언니인 시이모님 역시 고정 멤버로 출전하셨다. 이미 전날 어머님이 각종 양념과 재료들을 손질해 오셨기 때문에 당일에는 절인 배추가 배달 오면 버무리는 일만 같이 한다. 이번에도 어머니와 이모님의 옛날 이야기를 양념 삼아 소를 버무려 넣고 통에 담고 나니 한 시간 반만에 30여 포기 김장을 후다닥 마쳤다. 나는 곁에서 심부름 조금 하고 저녁에 먹을 수육을 삶았을 뿐인데 설거지를 마칠 무렵에는 기진맥진 어서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며칠 동안 고생하신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쓰러지셔야 할 것 같은데 고생스러운 것보다 뿌듯함이 더 크신 것처럼 흐뭇해하신다. 산더미같은 김장을 마치 전투처럼 해치우고 나면 겨울 내내 맛있는 김치 먹을 생각에 그렇게도 든든하고 즐거우신가보다. 그러고보면 엄마들은 사먹는 김치도 맛있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사다 먹는 김치는 제대로 된 진짜 김치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슨 짝퉁 취급을 한다.

 

나는 맛있는 김치를 사 먹는 것에 반감은 없지만 김장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뭔가 신성한 겨울철 연례행사가 사라지는 기분이라 아쉬움이 앞선다. 아마도 나는 아이들과 한집에 사는 한 이 김장 행사를 계속해 나가지 않을까 싶다. 내 어린 시절, 겨울 맞이 행사처럼 느껴졌던 김장이 나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아이들도 김장을 즐거운 축제나 연례 행사로 기억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들처럼 김치 달인의 경지에 오를 자신은 없지만 식구들끼리 잔칫날처럼 떠들썩한 김장 날 분위기라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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