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릇
12/03/18  

한겨울 솔잎 푸른빛이 눈 덮인 사이로 고개를 삐쭉 내밀 때면 어머니가 아끼던 그릇 세트가 떠오른다. 그릇, 접시, 찻잔 등으로 이루어진 한 세트가 어머니가 차단스(찻장, 찬장을 뜻하는 일본어)라고 부르던 그릇장에 모셔져 있었다. 그릇이나 접시, 찻잔 하나하나에 솔방울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푸른색 솔가지가 짙은 갈색의 솔방울 뒤에 있어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그릇이다.

 

본래 그릇이란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도구를 가리킨다.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요, 국을 담으면 국그릇,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용도가 달라지기는 하나 그릇은 변함없이 그릇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솔잎과 솔방울이 그려진 그릇을 그릇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릇으로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셔만 두었다.

 

어머니가 그 찻잔이나 그릇을 꺼내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사 갈 때마다 애지중지 깨지지 않도록 싸고 또 싸서 모시고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릇에 관심이 별로 없는 내게 갑자기 그 그릇들이 떠오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솔방울을 보면서 어머니의 그릇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때에나 사용함 직했던 그 그릇은 어머니에게 어떤 이유로 소중했을까? 곗돈을 부어 샀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선물한 것일까? 그릇 세트가 값비싼 것이라 아끼려고 했던 것일까? 과연 모셔 놓고 보면서 즐기셨을까? 아니면 아끼고 아꼈다가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혹시 여동생이 갖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동생도 그 그릇이 기억난다고 했다. 어머니가 이모들에게 솔방울이 그려진 찻잔을 꺼내 대접하는 것을 본 기억도 있다고 했다. 혹시 그릇의 행방을 아는가 물었다. 동생은 모른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부터 어머니는 앓던 사람이 쓰던 물건이라 누구라도 싫어할 것이라며 갖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추측컨대, 그때 다른 옷가지들과 함께 그릇들도 버리셨을 것이라고 했다.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꺼내 사용해야 한다. 아껴두고 사용하지 않다가 그냥 세상 떠나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고 보니 내게도 애지중지 모셔두고 사용치 않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다. 우선 라이터가 여남은 개는 된다.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 선물 받은 명품들인데 30여 년이 지난 탓인지 누가 선물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만년필도 꽤 여러 개 된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가끔 꺼내 보며 사용해야지 하면서도 다시 넣어 두곤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어떤 것은 잉크를 넣는 튜브가 녹아버려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도 했다. 만년필은 잉크가 필요한데 잉크를 어디서 파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다시 사용하려는 순간 새로운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잉크 파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각종 혁대에서 지갑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선물 받았던 것들이 많은데 언젠가부터 남기지 않고 무조건 착용하고 있다. 아껴두면 무엇하겠는가? 내가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도 없지 않은가.

 

라이터가 문제다. 사용하기 위해 다시 담배를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영원히 내 서랍장 속에서 머무르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굳이 사용한다면 산에서 버너나 등불을 켤 때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라이터 역시 라이터돌을 바꿔 끼워야 하고 개스를 넣어야 하기에 번거롭기는 만년필과 마찬가지다.

 

물건에 담긴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것은 값비싸고 귀한 것이지만 누가 준 것인지 언제 어디서 받은 것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함께 했던 분들과 보낸 소중한 시간과 그 선물의 귀중함은 그대로 있을 텐데 세월이 지난 뒤에는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저 세월만 탓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둔감한 기억을 탓해야 하는가?

 

어머니가 아끼던 그 찻잔으로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나 밥상에 자주 올리던 김치나 멸치 등을 담아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동생은 이모들이 방문했을 때 그 찻잔을 내놓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그릇을 이모들을 대접하는데 사용했다니 다음에 이모들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솔잎과 솔방울이 그려진 찻잔을 기억하냐고. 어머니가 소중히 여겼던 그 그릇에 대해 이모들은 어떤 추억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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