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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12/10/18  

한해가 저물어간다. 매년 이맘때면 송년모임이 직장, 동문회, 향우회, 각종 단체 등을 중심으로 줄을 잇는다. 누구에게나 송년모임에 대한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그 모임이 아름다운 추억일 수도 있고 기억하기 싫은 장면일 수도 있다.

 

미국으로 이주해 처음 참석한 송년회는 보이스카우트 모임이었다. 한국에서 함께 지도자 생활을 했던 분들과 이곳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이 초대한 자리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시절인지라 한 분, 한 분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여러 해 지나는 동안 한 분은 먼 곳으로 이사했고, 두 분은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인원이 줄어들고 있지만 만나면 그저 좋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모든 송년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잔뜩 기대하고 참석했던 동문 송년회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술판이 벌어졌다. 먹고 마시고 취기가 돌자 선배들이 마이크 앞에서 길게 연설을 했다. 그 내용도 덕담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취기를 이용해 객기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송년회 자리가 유쾌해야 하고, 그런 만큼 그런 자리에서 춤추는 것이 대수일까 마는 추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가고,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놓지 않았다. 짜증이 났고,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한국의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설문조사 전문기관 ‘두잇서베이’가 회원 및 패널 3,000여 명을 대상으로 ‘2018 송년회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전체 응답자의 60%가 송년회가 불편하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불편한 분위기를 첫 번째로 꼽았다. 한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이기는 하지만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비슷한 답변을 하지 않을까.

 

송년회에 참석해서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시기 싫은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고 부르기 싫은 노래를 불러야 하고 가끔은 듣기 싫은 노래도 들어야 하고, 억지로 끌러나가 춤을 추어야 하는 송년회라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마음이 불편해지는 송년회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편안하고 의미 있는 몇몇 송년회에만 발길을 한다.

 

해마다 참석하는 자원봉사 레인저들의 송년회는 한 회원이 다른 회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열린다. 대략 50여 명 정도가 모이는데 참석자들이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 온다. 그리고 20달러 상당의 물품을 갖고 와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면서 나눠 갖는다. 술을 마시기는 하나 가무는 없다. 송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해 동안의 레인저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더 나은 레인저활동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매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점심 때 시작해서 서너 시면 끝난다. 올해는 15일이다.

 

동네 로타리클럽 송년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주로 식당이나 골프장의 연회장에서 열리는 송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레인저들의 송년회처럼 20달러 상당의 선물을 준비해 와서 게임을 하면서 나눠 갖는다. 저녁에 모이기는 하나 6시에 시작해서 8시 30분쯤이면 끝난다. 음식을 나누며 한 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차기 회장을 선출한다.

 

중학교 동창들의 송년 모임은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10대에 까까머리로 만나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다. 더구나 먼 이국땅에서 만날 수 있어 송년회의 의미도 즐거움도 배가될 수밖에 없다. 별 다른 의식이나 격식을 갖추지도 않는다. 식사를 하면서 담소하고 수십 년째 반복되는 옛이야기를 나누고 한 해 동안 살면서 느꼈던 고충과 희망을 공유하고 헤어진다. 이런 자리가 즐겁고 유쾌하지 않을 리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른 아침, 한국사는 중학교 동창이 동창들 송년회 모습이라며 사진을 보내왔다. 친구들이 모여 식사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시작하더니 어울려 당구치는 모습, 유쾌하게 맥주 마시는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이어졌다. 사진 속 친구들의 모습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10대 때처럼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마음이 흐뭇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다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덕담을 건네준다. 특별히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전하고 새해를 축복하는 것이 전부다. 고국을 떠나 쓸쓸하고 외롭게 연말연시를 보낼 거라 생각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한 친구가 복권을 여러 장 사서 나눠줬다며 내 것도 있다고 했다. 따로 잘 보관하고 있다며 당첨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복권 발표는 이틀 뒤라고 했다. 복권이 당첨되면 당첨금으로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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