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12/10/18  

올해 서울에는 예년보다 조금 이른 11월에 첫눈이 내렸다. 토요일 아침, 친구가 보내준 첫눈 온다는 문자에 눈 비비며 일어나 창밖을 보니 수줍게 흩날리는 것이 아니라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났다. 이상하게 눈은 그렇다. 난생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그저 올해 첫눈이라는 사실만으로 소중하고 뭔가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주고 싶어진다.

 

함박눈을 보며 신이 나서 아이들을 하나 둘 깨우니 창 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풍경에 아이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하길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눈 내리는 고요한 운동장에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이 참으로 평화롭게 보였다. 두 팔 벌려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마치 강아지처럼 들떠 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나는 새 눈을 밟으려고 일부러 발자국 없는 곳만 골라 걸어 다니며 사각사각 눈 밟는 낭만을 누려 봤다.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져 보고 모두 힘을 합쳐 막내보다 큰 눈사람도 하나 만들며 손바닥이 얼얼해지고 옷과 신발이 축축해질 때까지 실컷 올해 첫눈을 즐겼다.

 

첫눈이 설레는 것은 비단 아이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첫눈은 떠올리기만해도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에 설렘과 그리움이 파문이 되어 번진다. 매년 내리는 첫눈을 다시 기다리는 이유는 “처음”과 “눈”이 지닌 아름다운 감성의 힘이 아닐까 싶다. 처음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모든 것이 특별해지고 세상에 하나뿐인 순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첫사랑, 첫 키스, 첫만남, 첫아이가 그렇고 또 모든 첫경험들이 그러하다. 처음이라는 것은 참 소중하게 다가온다.

 

첫눈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그때 그 시절과 달리 중년에 접어드니 하루하루 사는 데 바쁘고 반복되는 일상에 낭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돌보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즉흥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그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첫눈에 대한 약속이나 계획은 언감생심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내가 첫눈에 설렜으면 좋겠다. 눈 때문에 생기는 성가신 일들을 걱정하기 보다는 첫눈을 기다리고 첫눈에 가슴 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호승 시인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이 내린다”고 했고 어느 드라마 ost에서는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날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라고 노래했다. 첫눈은 새하얀 아름다움과 설렘은 물론이며 꼭 이루어지는 약속 같은 것이다. 매년 꼭 찾아오는 첫눈의 당위성 때문에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다른 기다림과 달리 평화롭고 온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여러분은 “첫눈”하면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시나요? 첫눈 오는 날 손가락 걸고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때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해줄까요?

 

새하얀 눈밭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을 향해 울부짓던 영화 “러브레터”속 여주인공처럼 외치며 칼럼을 마무리한다.

“오겡끼데스카? 와따시와 겡끼데스.”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요.)

- 현실은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누군가가 있을 리 만무함.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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