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12/17/18  

감사의 계절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해야 할 분들이 있다. 그 대상은 가족, 친척, 친지들을 비롯해 직장 동료, 이웃에 이르기까지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정성이 담긴 카드나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선물은 남에게 감사나 정을 나타내는 뜻으로 주는 물건이다. 필자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하고 값진 선물은 어릴 적 친구가 손수 그려준 그림이다.

 

세월이 흘러 그림을 선사했던 친구는 한국 화단의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화가 기평(奇平) 손영락 화백이다. 그가 제 23회 개인전을 연다고 알려왔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고 한국 사는 친구들에게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였다. 손 화백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초기에 아호를 현강(玄江)이라 했다. 검은 강이라는 그의 호에서 우리는 그의 우울을 읽어낼 수 있다. 현강이라는 한국어 소리가 주는 느낌은 밝은 편인데 그 한자의 뜻을 알고 들으면 깊숙이 어둠이 배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평으로 바꿔 불렀다. 기평(奇平), 기이한 평형이라는 호가 말해주듯이 그는 다리를 전다. 그러나 평형을 이루며 잘 걷는다. 그리고 잘 걸어왔다.

 

기평은 수유리 동네 친구이다. 그는 본래 다리를 절지 않았다. 태권도 유단자였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에 몹쓸 병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 필자가 의정부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 기평도 의정부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가까이에 있으니 자주 보련만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며 지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한 달여 전에 만나 그가 직접 그린 동양화 한 폭이 그려진 연하장을 받아다가 친지들에게 팔았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친구의 살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팔았다. 그 후 서울로 전근한 뒤에도 해마다 기평의 연하장 판매는 계속했다.

 

필자가 미국으로 이주하던 해 정월, 그를 찾았다가 하루 종일 집안에 있었다면서 갑갑해 하는 기평을 자동차에 태우고 근처를 드라이브했다. 그때 기평은 자주 차를 세웠다.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내려서 풍경을 스케치했다. 내 눈에는 별로인데 기평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추운데 떨면서 그를 지켜보는 일이 힘들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의 열정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기평의 작품을 미국에서 전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생활은 고단했다. 아침 일찍 창고에서 가드너들을 만나 일을 내보내고, 비디오 가게를 오픈했다. 종업원들이 오면 다시 학원으로 달려갔다. 학원은 두 곳에서 운영했다. 3개의 업종을 4곳에서 운영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좀 더 큰 비즈니스를 하려는 생각에 6년이 지나 사업체들을 다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물색하던 중에 라디오 코리아에 입사했다.

 

당시 라디오코리아 도산홀에서는 미술 전시회가 일 년에 몇 차례씩 열리고 있었다. 주로 한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분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들을 미국에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갤러리 원장에게 기평의 이야기를 하고 그의 작품을 보고 가능성이 있으면 미국에서 전시회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 2월 미국에서 기평의 전시회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음속에 품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이번 12월 14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개인전이 23회라고 하니 기평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기평은 집으로 돌아와 내려주고 떠나려는 내게 그림 한 점을 주었다. 나를 생각하며 그렸다는 그림은 창공을 나는 독수리였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위 태양이 이글거리고 구름 가득한 하늘을 나는 독수리. 암담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힘들어 하던 내게 그림을 주면서 기평은 말했다. “현실적으로 바다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가 있을 리 없겠지만 독수리처럼 용맹스러운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냐?”며 “사해(四海)를 돌아 휘몰아치라!”고 했다.

 

필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기평의 그림 한 점이 내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고 힘이 되었던가. 기평은 자신이 줄 수 있었던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이라 여기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정성을 다해 그렸을 것이다.

 

창공을 나는 독수리 한 마리, 그 독수리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25년이 지났어도 그림 속의 독수리는 날카로운 발톱과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날고 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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