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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을 못해
01/22/19  

어린이집에서 막내를 픽업하여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다가 내 핸드백이 살짝 아이 뒷통수를 스쳤는지 아이가 “아야!”하면서 나를 올려다 본다. “어머! 아팠어?”하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아이가 금세 “엄마! 미안해 해야지.” 한다. 그러고 보니 늘 아이들에게 사과하라고 가르치면서 모범을 보여야 마땅한 나는 정작 사과를 깜빡한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고의가 아니고 실수라도 남에게 불편을 주게 되면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면서 어른인 나는 얼마나 자주 사과를 잊어버렸는지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살아보니 한국 사람들은 참 사과에 인색하다. “I’m sorry.”, “Excuse me”를 밥 먹듯이 입에 달고 다니던 미국에 살다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온 천지에 무례한 사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는 독립투사의 후예라도 되는 양 말이다.

 

언젠가 가족과 함께 남한산성을 산책하고 내려와서 어느 백숙집에 들어갔다. 백숙집이 빼곡했지만 그 중 좀 크고 깨끗해 보이는 집을 골라서 들어갔다. 점심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갔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분주한지 좀처럼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고 주문 받고 음식이 나온 이후에는 직원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음식 맛도 기대 이하라 썩 기분이 좋지 못했고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주문 받았던 직원에게 불편함을 이야기하자 오늘 단체 손님이 들어왔는데 사장님이 교회 가시고 안 계셔서 바빴다며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편하셨다니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히 한마디만 해주었다면 끝날 일을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더 불쾌하게 만든 셈이다. 1-2만원짜리 식사도 아니고 꽤나 고가의 식사를 하면서 사장의 개인 사정이나 다른 손님들 때문에 내가 불편해야 한다면 그건 식당 측에서 양해를 구하고 사과해야함이 마땅함에도 불필요한 변명으로 무마하려고 하는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어제는 남편의 부탁으로 남편의 외국인 등록 증명서를 떼러 동네 주민센터를 찾았다. 미리 정부에서 운영하는 민원 사이트를 확인하니 배우자가 대신 방문할 경우 신분증과 가족관계 증명서만으로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어 미리 준비해서 갔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남편의 위임장이나 도장을 가져와야만 처리가 가능하다며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해당 사이트 페이지를 보여주며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왔는데 센터에서 다르게 안내를 해주면 어떻게 하냐고 말하니 실실 웃으며 그건 본인은 모르는 일이고 원칙적으로 위임장이나 도장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당사자의 신분증과 가족관계 증명서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다고 위임장을 찾는 것인지…… 위임장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위조할 수 있는 문서 아니던가? 그리고 외국인이 도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몇 분 동안 실랑이를 하는 동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없었다.

 

이런 일들은 유독 한국에서 많이 일어난다. 미국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서슴지않고 하는 편이라 가끔은 오히려 화낸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거나 할 말을 잃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불만을 잔뜩 머금고 컴플레인을 하다가 상대방에서 바로 사과를 하는 바람에 입을 꼭 다물고 마는 일도 허다했다.

 

사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진심 어린 사과만으로도 상황이 확 달라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시작한다면 크고 작은 싸움과 분쟁들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사과를 피하고 미루다가 오히려 큰 화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 보여 안타까운 순간들이 많다.

 

왜 말을 못하는가……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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