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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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04/23/18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가로운 주말이면 엄마는 이따금씩 나에게 흰머리를 뽑아달라 하셨다내가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후하진 않아도 군것질하기에 충분한 동전들로 나를 유혹하셨다시키니까 뽑긴 했지만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훨씬 많고 흰머리들이 있건 없건 달라지는 게 전혀 없을 것만 같은데 왜 이런 수고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백발 노인들을 볼 때마다 굳이 염색을 하지 말고 저렇게 근사하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었다나이를 거스르는 것보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이에 맞게 곱게 늙어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나이 지긋한 분들이 요란한 색으로 염색을 하거나 성형 부작용으로 자연스레 웃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맘 속으로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난 4나에게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오랜만에 저녁 약속이 있어서 거울 앞에서 모처럼 공들여 메이크업도 하고 머리 모양도 평소보다 신경을 쓰던 참이었다정확하게 가르마가 시작되는 앞부분에 한가닥의 흰머리가 화장실 불빛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심지어 도저히 발견하지 못하고는 못 배기게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예전에도 이렇게 한가닥만 올라온 적이 있었기에 별 생각없이 주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들춰보았는데 또 다른 흰 머리카락들이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못볼 걸 본 것 같았다처음에는놀랍고 신기하다가 나중에 뭔가 불쾌하고 언짢았다차례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는데 등떠밀려 내 순서가 먼저 와버린 기분이랄까……

 

며칠 후 무기력하게 인터넷에서 흰머리를 검색해 보았다고작 이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어쩐지 한심하고 서글프기까지 했다흰머리는 노화의 과정이며 인종별로 발생 시기가 다른데동양인은 대체적으로 30대 후반에 모발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한다노화라는 단어가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게 확인사살을 마쳤다게다가 공교롭게 나는 지식 백과에서 알려준 30대 후반에  또 흰머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스트레스 최고조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내가 지금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들 아무 것도 놀랄게 없는 일이었다오히려 너무도 때마침적절한 시기에 흰머리가 찾아와준 것이다.

 

흰머리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같은 게 따로 있는 걸까어디 지침서 같은 건 없는 걸까노화를 준비하는 자세란 어떤 걸까남들에게 찾아온 흰머리나 노안 같은 건 그저 자연스럽고당연해 보였는데 어째서 나에게 시작된 노화는 이리도 낯선걸까…… 먼 훗날일 것만 같았던그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인가……

 

아직도 내 흰머리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글을 쓰고 있다그나저나 나보다 두 살 어린 친구가 흰머리가 너무 많아져서 염색을 안 할 수 없게 되었다며 툴툴거릴 때 왜 벌써 흰머리 타령이냐며 하하 웃으며 놀렸던 게 지난 겨울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다른 이의 흰머리 이야기에 웃을 수 없게 되었다사정이 이런데도 흰머리에는 명쾌한 치료법이나 예방법도 없다하니 이제 나도 동전을 내걸고 내 아이들에게 흰머리 뽑기를 부탁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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