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02/11/19  

비가 닷새째 연이어 왔다. 쉬지 않고 내린 것은 아니다. 쏟아지다가 잠시 쉬기도 했다. 가늘게 뿌리다 퍼붓다가 쉬엄쉬엄 오다가 그쳤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설날 아침 출근길에도 빗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보니 날이 개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맑은 하늘에 구름만 뭉게뭉게 떠가고 있었다.

 

바다로 갔다. 파도가 심했다. 제법 높게 뛰어 올랐다. 첨벙 뛰어들어 헤엄치고 싶은 바다가 아니다. 그러나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도를 타기 위해 물속에서 손을 저으며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 저편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덮고 있었으나 바다에는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바다로 달려온 것이 저 뭉게구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얼마 앞둔 어느 날, 학교에 가지 않고 산으로 갔다. 산속에서 텐트도 없이 지냈다. 낮에는 산속을 헤매 다니다 비를 피해 적당한 곳에서 잤다. 사흘 째 되는 날, 잠에서 깨어보니 하늘에 하얀 구름이 뭉실뭉실 퍼져가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친구가 매일 다녀갔다고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친구. 중학교 1학년 1반, 고등학교 3학년 9반 같은 반이었다. 친구 집은 인현동, 우리 집은 수유동, 학교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 방향이다. 지나는 길에 들린 것이 아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온 것이었다.

 

누워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밖에서 어머니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여니 친구가 서 있었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기만 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앞에 놓고 앉아 어기적어기적 먹으면서도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친구와 바다에서 찍은 사진을 찾는다. 제주도 어느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1년이 지난 해 여름, 그가 살고 있는 제주를 찾았다. 친구는 둘째를 낳았다며 기뻐했었다. 그날 바닷가에도 뭉게구름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모 기업의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수석 상무까지 지냈던 친구는 회사 퇴직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12년 전 세상을 떠났다.

 

긴 해안선을 따라 눈길을 옮겨 본다. 정말 길다. 길게 이어진 백사장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추억이 있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미국생활에 적응할 무렵,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세 가지 일을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때였다. 바쁜 와중에 잠시 짬을 내어 부모님을 모시고 왔었다. 바로 저 모래사장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스마트폰 속에 옮겨 놓은 사진을 꺼낸다. 내가 갖고 있는 사진들 속에 가족사진 빼고 부모님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어머니와 나는 검은 선글라스를 꼈고, 아버지와 내가 좌우에서 어머니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

 

그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바다에 갔었다는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사진 속의 우리는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어머니와 나는 반팔 셔츠를, 아버지는 긴팔을 입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옷 입은 것으로 계절을 판가름하기는 그렇지만 한 여름은 아니다. 해수욕하기는 성급한, 아마도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머니는 모자를 벗어서 손에 들고 있고 나는 사진기와 모자를 들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운동화를 싣고 있고, 나는 가죽 끈으로 된 신이다. 아버지 등 뒤로 여성 서퍼가 서핑보드를 들고 가는 뒷모습이 보이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저 멀리 피어가 보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차례를 지냈었다. 설날과 추석이면 차례 상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 3년 상을 치른 뒤로는 한국에서 동생들이 성당에서 올리는 합동위령 미사로 대신하기로 했다. 올해도 동생이 부모님 위패를 모신 사진을 찍어 보내 주었다.

 

맑았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다시 비가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얀 구름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창밖에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뭉게구름이 가져다 준 추억과 옛이야기를 회상하며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검은 구름 흰 구름이 번갈아 하늘을 덮고, 빗줄기도 오락가락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맞이하는 스물여섯 번째 설날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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