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미니멀리즘
02/18/19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혈연·지연·학연 등 어떤 끈이라도 붙잡고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사회생활의 지렛대로 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의 한 생존전략이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옛 친구나 동창들 모임에 열광한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 뺏기기 싫다.’며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없는 동창회나 친구들의 모임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친척들 모임조차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존 인간관계를 점검하고 구조조정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혼자’ 남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즉흥적이고, 비연속적이며,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밀도가 약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관태기’라는 말이 있다. ‘관계’라는 단어와 ‘권태기’를 조합한 신조어이다. 인맥 유지나 관리에 따르는 피로감, 회의감 등을 느끼는 상태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도 부담을 느낄 때 관태기라고 말한다. 또 ‘티슈인맥’이라는 말은 ‘티슈’와 ‘인맥’의 합성어로 한 번 쓰고 버리는 티슈처럼 필요할 때만 소통하는 일회성 인간관계를 가리킨다. ‘인맥다이어트’라는 말도 있다. ‘인맥’과 ‘다이어트’의 합성어로 번잡한 인간관계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혹은 바쁜 생활에 쫓겨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취관’은 ‘가벼운 취향 위주의 관계’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전에도 관심사나 취미 등을 매개로 만들어진 관계가 많았으나, 더 쉽고 가볍게 모임을 만들고 그만큼 쉽게 흩어진다. 또 관계의 주제가 무겁지 않고 작고 소소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다. 취미라기보다는 흥미에 가까운 주제라 활동주기도 짧다. ‘인간관계 O2O’란 말도 있다.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인간관계를 온라인에서 찾아서 해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온라인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스터디 할 사람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취미생활을 할 친구도 찾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런 신조어들은 필요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비연속적인 만남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현대인들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의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대 남녀 6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대 4명 중 1명(25%)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학 3~4학년과 직장인들이 관태기에 더 공감했고,'처음 만났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50.1%, '대화가 끊겼을 때 불안감마저 느낀다'는 응답이 41.7%로 높게 나타났다. 많은 젊은이들이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어울려 대화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예전엔 혼놀족(혼자 노는 사람들)에 대해 동정 어린 시선이 따라다녔지만 이젠 제법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혼자 밥을 먹고(혼밥), 혼자 공부(혼공)하고 혼자 논다(혼놀). 혼자 밥을 먹거나 공부하고 놀면서 온라인으로 소통한다.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또 집단을 중시했던 과거세대와 달리 원치 않는 일을 하거나 남에게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관계적으로 독립성이 강해진 것이다. 따라서 온라인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성이나 협력성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치열한 경쟁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자기중심 가치관이 자리 잡아가고, 각자 살아가는 것이 일상화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삶을 위해 복잡한 인간관계를 비워내는 행위에서 만족을 느끼는 풍조도 한몫하고 있다. 이로 인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생활하는 독립 혹은 고립에서 오는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인터넷 사회 관계망 서비스 활용을 통한 관계 정립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새로운 인간관계의 시대를 맞아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구조조정을 통해 불필요한 사람들의 연락처를 다 지워버리고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만남도 최대한 억제하고 꼭 필요한 사람, 상호간에 필요한 사람들끼리의 만남만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일가친척과 유대를 곤고히 하면서 친지들과의 만남도 소중히 여기며 살 것인가.

 

내게는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사는 편이 더 편한 듯싶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한국에서 고교 동창생이 왔다는 전화를 받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십여 년만에 만나는 친구, 만난 지 3~4년 된 친구들 모두 바쁘게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 덕분에 만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오후 4시에 만나 12시까지 커피집, 바베큐식당, 칵테일 바, 설렁탕집으로 옮겨 다니며 옛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역시 나는 구세대임에 틀림없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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