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을 기다리며
02/25/19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다. 며칠 전 잠깐 눈이 흩날릴 거라는 일기 예보와 달리 하루 종일 눈이 펑펑 내린 날이 있었는데 기상청이 이를 의식했는지 이번에는 일찌감치 기상 특보로 대설주의보까지 내리며 예보를 서둘렀다. 오늘은 슈퍼문이 뜬다는 정월 대보름인데 하늘을 바라보면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으로 눈이 따끔따끔할 정도이니 과연 달맞이를 할 수 있을까 슬슬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도 눈이 내리는 날은 옛 기억들을 들추며 추억하기 좋다. 그리고 이렇게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눈을 보고 있자니 5년 전 겨울이 떠오른다.

 

그 당시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회사와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직접 차를 몰고 텍사스에서부터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야만 했다. 고용 제안을 하고 모셔갈 때는 항공권은 물론 이주 비용 일체를 지원해주더니 회사를 떠날 때는 자동차 가스비조차 지원되지 않았다. 당연한 대기업의 생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에 짐을 잔뜩 싣고 혼자 차를 몰고 돌아올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 미국 중부 지방에 이상하리만큼 눈이 쏟아졌고 하필 남편이 텍사스를 출발해서 돌아오는 길에도 무서우리만큼 눈이 내렸다. 광활한 대지와 끝도 없는 사막을 지나 밤이되자 한치 앞 시야 확보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하이웨이 도로가 얼어붙었고 아예 운전 자체가 불가능해져 도로 위에서 다른 차들과 함께 꼼짝없이12시간 가량을 정차한 상태로 갇혀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튿날 동이 트고 경찰 사이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깰 때까지.

 

가끔 생각해본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눈보라 빙판 길, 차 안에서 밤을 지샌 남편은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애 셋 딸린 (그 당시 아직 막내가 태어나기 전)  30대 중반의 젊은 가장의 두 어깨는 얼마나 무겁게 짓눌려있었을까……  그래도 가족이 기다리는 집에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었을까…… 식구 많은 집의 가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돌아오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까…...  그 밤은 정말이지 남편에게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의 가혹한 밤이었다.

 

남편이 도로 위에서 밤을 지샐 때 나도 아이들과 기도하며 남편을 기다렸다. 언 1년 동안 남편없이 아이 셋을 돌보느라 나 역시 지칠대로 지쳐있었으므로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할 망정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 그저 기쁘고 반가웠다. 아무튼 남편은 그렇게 이틀을 열심히 달리고 달려 무사히 크리스마스 전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새 또 다시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언젠가 또 다시 눈보라를 만난다면 시리고 아프겠지만 그간 잘 버티고 또 잘 지켜낸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아침 내내 함박눈이 내리다가 정오가 지나며 진눈깨비가 날리더니 이제는 비가 내리고 있다. 쌓였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깜쪽같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니 곧 봄이 올 모양이다. 잠시 후 구름 사이로 보름달을 만나거든, 자랑스러운 우리집 가장인 남편의 평안을 빌어주며 사랑의 텔레파시라도 보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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