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03/11/19  

나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중년 아줌마지만 아직도 아주 가끔씩 어렸을 때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간 듯 옛날로 돌아가 어릴 적 친구들과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놀고 있다. 이제는 일부러 애를 써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친구들과 다시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 옛날 동네에서 노는 꿈을 꾸고 일어나면 머릿속 아련한 옛 필름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우리집은 자주 이사를 했었다고 한다. 셋방에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이 몇 장 남아있긴 하지만 나는 그 집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내가 대여섯 살쯤인가 80년대 초 부모님은 방 두 개짜리 첫 아파트 장만에 성공하셨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조금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 살았다. 작은 방이 두 개 있고 뜨거운 물이 나오지않아 겨울이면 물을 끓여 씻어야 하는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엄마는 자주색 고무 대야를 욕조 삼아 우리를 씻기셨고 식탁이 없어서 엄마가 찬들을 상에 올려 방으로 들고 들어오셨다. 이제 막 컬러 티브이가 나오기 시작했던, 이사올 때 꼭 붉은 팥시루떡을 돌리던 시절 이야기이다.

 

서울 변두리에 자리했던 그 아파트 뒤편으로 뒷산 약수터치고는 뭔가 더 시골스러운 논밭도 있었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깻잎을 심었다가 삼겹살 굽는 날은 손수 깻잎을 따오셨고 쑥을 캐서 쑥개떡을 해먹기도 했다. 5층짜리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엄마들도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가 많았는지 이웃들과 왕래가 잦았던 것 같다. 생일이 되면 동네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하기도 했고 동네 아줌마들과 취미 활동이나 쇼핑 품목을 공유하는 등 엄마 평생에 있어 이웃과 가장 활발히 왕래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고된 육아 동지쯤 되었던 게 아닐까……

 

더운 여름 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없는 집도 많던 시절이니 무더운 열대야에 다들 뾰족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저녁 먹으라며 부르는 엄마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언제나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길 건너 고층 아파트로 엘리베이터 탑승 원정을 가기도 했었는데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그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집 같은 층에 돌아이(정확히 하자면 또라이)라는 별명을 지닌 아저씨가 살았는데 사실 아저씨는 별명과 달리 보통 사람들 보다도 점잖은 사람이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아저씨는 편평한 얼굴에 눈초리가 올라간 다운증후군 환자였고 조금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안타깝게도 동네에서 기피 대상이 되었고 아이들은 모두 아저씨를 무서워했다. 그래서인지 아저씨는 웬만해서는 혼자 다니는 일이 없었고 그 집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있었다. 어느 날 그 집 앞을 지나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렸고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악’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내달렸던 것 같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뿐 아니라 뒷산이며 논밭까지 빼곡히 고층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는 그 동네를 이따금씩 꿈결처럼 기억해내곤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지만 굳이 가서 확인하고 싶진 않다. 나이 먹은 후 어릴 적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반드시 후회한다는 철칙과 비슷한 걸까…… 꿈에 나오는 옛 동네는 아련한 기억 그대로 남겨 두고만 싶다. 

 

우리 아이들도 가끔씩 자기들이 태어나고 자란 오렌지카운티 꿈을 꾸고 있을까…… 지금도 종종 추억에 잠긴 듯 산책길 물가에서 오리떼를 만났던 일, 여름이면 커뮤니티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며 핫도그를 만들어 먹었던 일, 주말이면 자주 인앤아웃 햄버거를 사먹었던 일, 밤 9시 반이 되면 디즈니랜드 폭죽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불꽃으로 수놓았던 기억들을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는다.

 

“엄마, 우리는 언제 다시 미국에 갈 수 있어?”

아…… 나는 오늘도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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