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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집
03/18/19  

선생님, 저 봉우리가 뭐 같이 생겼어요?”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글쎄.” 둥그렇게 솟아 오른 산봉우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국자 두 개를 거꾸로 세워둔 것일까. 컵 두 개를 엎어 놓은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골몰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진득하게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소년이 말했다. “선생님, 저 봉우리 두 개가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유방봉이라고 불러요.”

 

중학교 1학년짜리가 담임선생님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한데 뭐 그리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았다.

 

교사가 되자마자 중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학급에 백인 혼혈아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아주 밝고 명랑한 소년이었다. 늘 환하게 웃는 학생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뒤, 교장이 불렀다. 학급에 문태근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가정방문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혼혈아가 문태근이었다. 왜 교장이 학생 가정방문을 지시하는 것인가 의아하게 생각되었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직접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태근이는 의정부시 외곽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오른쪽 벽에 칠판이 있었다. 빼곡하게 무언가 쓰여 있었다. 어떤 내용인지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집안에서 영어를 사용하면 벌금이 얼마라고 적혀 있었다.

 

그 집에는 다섯 가족, 열두 명의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가족 공동체 일원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덕수중학교 교사라고 소개하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다섯 가정이 버는 수입을 모두 모아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했다. 태근이가 사는 집이 바로 ‘새벽의 집’이었으며, 그 새벽의 집을 설립한 사람이 지난 9일 소천한 태근이 아버지, 문동환 목사다.

 

새벽의 집은 1972년 '이윤 동기'로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나눔 동기'로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다섯 가정 열두 명이 문 목사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시작되었다. 식사 때는 서로 손을 잡고 식사 노래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피아노에 둘러서서 즐겁게 노래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새벽의 집 식구들이 아껴 쓰고 모은 돈으로 유치원까지 운영했으며 꽤 활발하게 공동체생활을 유지해 왔으나 문 목사는 신군부의 탄압으로 도저히 한국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1980년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문동환 목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새벽의 집은 문을 닫았다.

 

박정희,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무렵 귀국한 문 목사는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지도자, 진보적인 민중 신학자로 정권에 의해 두 차례 한신대 교수직에서 해직당한 학자, 목회자였던 그가 정치에 입문했다.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고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혹자는 그를 공산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는 물론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받아 남한으로 부모와 함께 피신했으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그러나 민족 통일을 위해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하며 인류가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문동환은 애국주의, 애족주의를 넘어서서 세계 온 인류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인류박애주의자였다.

 

문동환 목사는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말했다. “내 염원이라면 문 대통령이 민주화운동과 아시아 평화에 공헌하고, 중공(중국)과 친하게 돼서 중공을 통해 북한에 영향을 주고, 남북한이 가까워지도록 정치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지. 정당들은 경쟁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정말 사회를 좀 더 민주적인 세상으로 만드는 선의에서 경쟁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세상이 오는 것이 나의 꿈이야.”

 

민주화를 입으로만 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민주화의 선봉에 서서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투사, 그가 현실에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악을 욕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 속에 있는 악을 보면 철저히 몸서리쳐야 한다. 그리고 아파하는 사람의 아픔에 자신을 노출시켜서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만들어야 한다. 계속 고민하면 하나님이 답을 줄 것이다.”

 

그날 문 목사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근이 엄마도 외출 중이었고 덕수중학교 선생님이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저녁식사인지 간식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고구마를 대접해서 맛있게 먹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비추는 맑은 날이지만 3월의 바람이 제법 차다. 태근이와 함께 새벽의 집(가정방문) 가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 천진난만한 소년이 웃으며 내게 묻고 있다. “선생님, 저 봉우리가 무엇처럼 보여요?” 이제 태근이도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텐데......

 

삼가 고 문동환 목사의 명복을 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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