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면 안다
04/01/19  

K 선배는 만날 때마다 옛날 같지 않다고 했다. 재미가 없다고도 했다. 띠동갑인 K 선배는 함께 골프를 치면서, 설렁탕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사는 낙이 없다’고 되풀이 얘기했다. 아름다운 것을 봐도 감흥이 일지 않고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를 보거나 신나는 이야기를 들어도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때 선배는 70대 초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난주 우연히 K 선배를 만났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선배가 아들부부, 손자손녀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달려가 인사했다. ‘재미가 없다’고 노래하던 선배가 아니었다. 사진작가에게 사진 촬영에 관해 배우고 있으며, 여기 저기 출사도 나간다며 내게도 사진을 배울 것을 권했다.

 

P 선배는 70이 넘어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있다. 일을 줄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은퇴하기는 싫다고 했다. 부부가 종업원 몇 사람과 교대하며 일하는 것이기에 큰 힘이 들지 않는다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선후배들과 가끔 만나 식사를 하고 골프도 치면서 지내고 있었다. 늘 환하게 웃는 선배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했다. 그 선배가 꽃구경 가자며 연락했다. 선배를 모시고 오가는 동안 차안에서, 식당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선배는 월남에 다녀오기로 했다며 맹호부대 병사로 보낸 월남에서의 1년을 회상하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고 했다.

 

뉴욕에 사는 H선배는 작년에 은퇴했다. 2.11~2.18에는 유타의 Snow Bird 스키 리조트, 2.18~2.22에는 캘리포니아의 Squaw Valley에서, 2.22~2.27에는 캘리포니아 Monmouth에서 스키를 타고 있다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스키 타는 모습을 전송해왔다. 3월에는 스위스 Three Valleys에서 스키 타고 있다면서 동영상과 사진 수십 장을 전송해왔다. ‘트리 밸리’는 유타주, 코로라도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스키장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스키 리조트라고 했다. 5월 중순에는 캘리포니아주 맘모스 스키장에 가기 위해 뉴욕에서부터 대륙 횡단을 계획하고 있었다.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하는 L 선배는 은퇴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대신 앞으로 버는 돈은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쓸 거라고 했다. 부인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면서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줄 예정이라고 했다. 아울러 자신의 고향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선배는 한국에 갈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선배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이 바로 나의 삶이요 내게 벌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이 들면서 젊은 시절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K 선배 말처럼 감성이 무디어지기도 하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육신과 정신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람 만나는 일이 귀찮아진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분이 착 갈아 앉는 날이 많다. 이를 갱년기 때문이라며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아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나이 먹어 그런 거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대수롭게 지나칠 일도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기억력이 둔화되었다면 모든 일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어야 한다. 수첩이나 전화기 등에 세세하게 적는 습관을 들인다면 잊어서 보는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려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오래 생각하고 천천히 행동한다면 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 실수는 타인들도, 자신도 쉽게 용서하고 쉽게 잊을 수 있지만 나이 들어 하는 실수는 인생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

 

K 선배처럼 시간을 내서 사진 찍는 기술이나 방법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퐁퐁 찍는 것보다 훨씬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P선배처럼 옛 추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거나 H 선배처럼 몇 달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스키를 타는 것도 멋진 일이다. 선교사들을 돕고, 젊은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도 보람차고 값지다.

 

그러나 지난 삶이 그랬듯이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즐기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 여행도 하며 하루하루를 재미나게 지내는 삶도 과히 나빠 보이지 않는다.

 

의미 있는 하루하루가 쌓여야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을 나이든 사람들은 평소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안다.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삶이 노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것이다. 단지,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의미와 가치를 깊이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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