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르침
04/08/19  

봄이 왔다. 활짝 핀 목련이 담장 너머로 함박웃음을 보낸다. 야생화들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프리웨이를 달리는 운전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우수, 경칩, 춘분을 지내고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청명을 보냈다, 농사에 도움이 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곡우가 머지않았다. 올해도 중반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과연 예전에도 이렇게 절기를 따지고 농사일에 관심을 두면서 살았던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절기를 운운하고 농사일을 얘기하는 걸 보면 철이든 탓인가 관심 분야가 달라진 것인가.

 

이맘때면 하늘이 맑고 청명한 날의 연속이라고 청명이라 불렀거늘 청명은커녕 창밖으로 보이는 전방시야가 흐려 강변 건너 아파트들이 보이지도 않는다. 희뿌연 속으로 가끔 허연 그림자가 모습을 들어낼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고국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아침이다. 한식 청명을 맞이하여 현충원에 계신 부모님 뵈러 가는 날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 양쪽으로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다. 올림픽대교, 잠실대교, 청담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등 딸이 사는 동네에서 현충원까지 오는 동안 다리를 세어 보니 9개나 된다. 자동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다리가 이렇게나 많다니.

 

성묘하는 사람이 많은 절기인지라 걱정했다. 인파가 밀려 혼잡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충혼당으로 향했다. 살아서도 아파트에 사시더니 돌아가셔서도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몇 층 몇 호인가 욀 필요는 없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도록 판에 넣어진 아버지 어머니 사진이 반겨준다.

 

부모님을 모셔 놓은 단지를 앞에 두고 간단하게 가톨릭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옆 건물, 제례동에 준비된 방으로 가서 제대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화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니 두 분의 영정사진이 떠올랐다. 화면 아래 제대에 동생들이 준비해온 향을 밝히고, 사과와 막걸리로 간단하게 형식을 갖추고 인사를 드렸다. 사과를 먹으며 벽을 보니 방안에서는 음식을 먹거나 마실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입안에 들은 음식들을 부지런히 씹어 삼키고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일어섰다.

 

아버지 얘기는 잠깐, 언제나 어머니 얘기가 더 뜨겁다. 어머니의 뜨거운 교육열에 대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공부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 믿음을 생각으로만 갖고 있지 않았다. 말로만 하지도 않았다.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린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빨래골이라 불렸던 가난한 동네 무허가 집에 살면서도 자식을 과외공부시켰으며 수업료를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어머니는 우리가 살던 무허가 주택을 관공서를 직접 찾아다니며 행정절차를 밟아 국가로부터 불하 받아 내었다. 사방공사 현장에서 돌 나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화장품 행상을 하셨고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보험 아줌마로 일하셨다. 어머니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지금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꿈과 희망으로 어려운 그 시기를 견디어 내었다. 지금까지 4남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하고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어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는 자신의 병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일했다. 그러나 당신이 중병에 걸린 것이 밝혀지자 모든 일을 놓고 오직 치료에만 몰두했다. 수술하고 대부분 1~2년 안에 세상을 떠난다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5년도 넘게 살았다. 그리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찾아온 또 다른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나의 삶이 내 가르침이오, 나의 삶이 내 메시지이다.'라는 틱낫한(Thich Nhat Hanh)스님의 말씀이 어머니의 전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량의 물결 속에 남들에게 뒤질세라 재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빌딩의 숲을 이리저리 잘도 빠져 나간다. 그 속에서 과거의 모습은 저 만치 사라져가고 힘찬 오늘과 희망찬 미래의 꿈이 우리를 맞으며 달려 오는 듯 하다.

 

오늘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나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아닐까?

 

노란 개나리와 분홍 진달래가 만발한 봄날 오후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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