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홈으로 나는야 1.5세 아줌마
냉면
04/22/19  

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잠시 동안 그는 제 멋대로가 되고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음식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일본 TV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 등장하는 오프닝 나래이션이다.

 

나는 냉면을 좋아한다. 어제 저녁으로 냉면을 먹었어도 오늘 점심으로 냉면을 또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한겨울에도 즐겨 먹고 딱히 먹고 싶은 메뉴가 없을 때는 자연스레 냉면을 떠올릴 정도로 굉장히 좋아한다.

 

냉면은 워낙 마니아 층이 두터운 음식이다 보니 유난히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 중 하나인데 나는 평양식 냉면보다는 함흥식 냉면을 더 좋아한다. 혹자들은 진정한 냉면은 평양냉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던데 아무리 이러쿵저러쿵해도 내 입 맛에는 함흥냉면이 더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침 남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해서 냉면은 우리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누가 먼저 냉면을 좋아해서 따라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좋아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가 함흥 냉면을 좋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원래 나는 어릴 때 주로 비빔냉면을 먹었는데 스무 살 무렵, 가든그로브에 있는 식당에서 함흥식 물냉면을 접한 이후부터 물냉면 러버가 되었다.  깨끗한 육수 안에 얇지만 쫄깃한 면이 또아리를 틀고 그 위에 배 한 조각, 계란 반 쪽과 살얼음 두둥실이면 육신의 더위뿐 아니라 가슴속 답답함마저 날려보낼 수 있는 음식이 바로 물냉면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미국에서는 입맛에 맞는 물냉면을 맛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가든그로브에서 먹었던 그 함흥냉면 식당도 어느 날 주인이 바뀌더니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늘 냉면에 목마른 나에게 한줄기 광명처럼 나타난 또 하나의 냉면 맛집이 있었으니 그 집은 동네 찜질방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사실 그집 냉면은 고급스러운 맛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조미료에 길들여진 내 간사한 입맛을 즐겁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찜질방에서 몸 안의 수분 한 방울 한 방울 최대한 날려버린 후 갈증이 최고조에 이를 때 물냉면을 만나면 평소에 먹던 냉면과는 또 다른 신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눈 떠보니 애가 넷, 육아에 찌들어 몸부림치던 시절에도 나는 냉면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찜질방에서 먹던 냉면이야말로 그 시절 나에게 최고의 사치이자 치유제였다.  찜질방 식당 냉면 오더 마감은 밤 9:30분! 나는 9시에 아이들을 재운 후 부랴부랴 찜질방으로 달려가 신속한 샤워 후 환복하고 최고 온도의 황토방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흘린 이 땀으로 곧이어 짜릿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쁨에 벌써부터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했던가……  찜질방 냉면은 그 당시 나에게 최고의 힐링 푸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냉면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인생에도 최악의 냉면은 있었다. 남편이 베스트맨으로 참여한 남편 친구의 결혼식 리허설 디너로 산호세에서 유명하다는 한식당에 갔었는데 그때 그 냉면을 절대 잊지 못한다. 나름 산호세 근방에선 최고 맛집이라고 부르던 집이라 기대도 컸다. 오랜만에 단체 냉면 손님이라며 분주하게 오가던 식당 종업원들이 내온 냉면은 처참하다 못해 암담했다. 모양은 둘째치고 맛이 정말 찬물에 소금 탄 맛?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육수이고 무엇이 냉면인지. 라면처럼 집에서 끓여 먹는 인스턴트 냉면만도 못한 최악의 냉면이었지만 그 잊지 못할 맛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내 인생의 최악의 냉면, 내 냉면 역사에 길이 남을 그런 맛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 미국에서 만난 냉면 이야기에 불과하다. 여전히 나의 냉면 기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한국에 오면서 새롭게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즐거운 것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냉면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냉면집부터 유명 셰프들이 손꼽는 냉면집들까지 하나 하나 도장깨기 하듯이 찾아다니며 내 인생 최고와 최악을 찾아 나서고 있다.  냉면을 통한 내 최고의 치유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 될 예정이다. 지금도 칼럼을 쓰는 내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내일 점심은 냉면인 건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