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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낙원
04/23/18  

이사하고 집을 옮기는 중에 사정상 한 4주 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머물게 되었다. 결혼해서 분가한 이후로 친정에 이렇게 오래 머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내가 살았던 집이고 13년 동안 변한 게 별로 없었지만 아이들까지 데리고다시 들어오며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부모님 연세도 있는데 많이 힘드시겠구나...… 아이들도 생활 환경이바뀌어서 적응하려면 피곤하겠구나...… 나도 이것저것 신경쓸 일이 많아지겠구나 싶었다.

 

친정살이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을까...…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다. 자도 자도 잠이 몰려왔다. 매일 아침 6시면 평소처럼 눈이 떠졌지만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계속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친정 엄마가 아이들 아침 식사를 챙겨 주셨다. 에그, 베이컨, 씨리얼, 밥, 과일, 고구마 등등 아이들의 주문이 다양했지만 외할머니는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요구를 충족시켜주셨다. 덕분에 나는 거의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여유 있는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생활 공간이 바뀌어서 불편한 점들도 있었지만 뭔가 긴장이 하나둘씩 풀어지고 있었다. 빨래는 쌓이기 전에 늘 바로 바로 세탁되어 내 방으로 돌아왔고 쓰레기통도 늘 비워져 있었다. 밥통에는 늘 갓 지은 밥이, 냉장고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료와과일이 꽉 차 있었고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아이들을 돌봐 주셨다. 자식이나 남편이라면 의레 내가 해주길 바랬을 수많은것들을  친정 부모님은 묵묵히 대신 해 주셨고 덕분에 나는 최고의 휴가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아직 친정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 저녁에는 개인 약속이 이어졌는데 아이들을 맡기고 놀다가 돌아오면 아이들은곤히 잠들어있고 친정 아버지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셨다. 내가 몇 시에 돌아오든 늘 TV를 보고 계시다가 잠시 후 방으로들어가시는 것 같았다. 처음 며칠은 아버지가 꽤나 늦게까지 TV를 보시는구나 싶었지만 계속 반복되니 나를 기다리셨나 싶기도 했다. 마치 내가 결혼하기 전 그때처럼 말이다. 아직도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묘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늘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고 책임져야하는 위치였는데 나도 보호받고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꽤나 든든했다.  

 

그리고 한 달 간의 유럽 배낭여행 중 며칠간 펜팔 친구네 집에 머물렀을 때가 떠올랐다.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서의 며칠은 정말 눈코 뜰 새 없는 고단한 배낭 여행 일정 중 유일하게 편히 쉴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아침이면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친구 엄마가 만들어 주신 뷔페식 아침 식사를 먹고 그렇다할 일정도 없이 친구가 계획해 준 소소한 일정들을 소화하며 계속쉬고 또 쉬었다.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었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서도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배낭 여행 내내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고 늦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부지런을 떨었던 나였는데 여행 중의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지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다. 여행 중 느꼈던 그때 그 달콤한 휴식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친정에 머무는 지금 바로 그런 기분이다. 고단한 여행 길에 잠시 쉬고 있는 느낌이랄까...… 게으름을 부려도 눈치 주지 않고할 일을 하지 않고 실수를 해도 비난 받지 않는 우리 집. 친정은 나를 쉬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지상 낙원인 것이다.

 

친정살이도 이제 열흘 정도 남겨두고 있다. 손주들은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는 말처럼 친정 부모님도 꽤나 피곤하실 것이다. 어진 효녀라면 짐을 좀 덜어드려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철부지 딸이 되어 좀 더 친정살이를 만끽하고 누려볼까 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해 볼까 싶어서 충분히 누리고 떠나려고 한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 전 세상에 둘도 없는 친정낙원에서 마음껏 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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