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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하나다
05/13/19  

불기 2563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지난 8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부처님오신날 봉축표어인 '마음愛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처럼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사랑과 자비의 씨앗을 심어 평화의 꽃을 피워내길 바란다."고 염원했다. 오늘날 불신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는 부처님의 평화와 자비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다면서 "불교에서 가르치듯이 모든 존재가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기 안의 탐욕을 비워 자비를 채워나간다면 이 세상에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이라며 평화롭고 자비가 넘치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길 기원했다. 대한민국 천주교의 수장이 불교의 교주 탄신일에 축하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귀중한 모범은 이미 기원 전 3세기 경, 인도를 통일하여 광대한 불교왕국을 건설했던 아쇼카 왕의 비석에 새겨진 칙령에서도 찾을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종교만을 숭앙하고 다른 종교를 저주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만을 숭앙하고 다른 종교를 저주하는 자도 누구나 내 종교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종교에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신의 종교를 더욱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화해하는 것이 좋다. 경청하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의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 불교문화와 불교문명의 가장 귀중한 이념이었다. 이것이 바로 2,500여 년의 긴 포교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불교도로 만드는데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또한 종교적 박해도 받지 않았던 이유이다. 불교는 평화적으로 아시아 대륙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5억의 신도를 확보했다. 어떤 이유를 앞세우든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 상반되는 것이다.

 

사실 부처란 말은 어떤 특정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을 일컫는 Buddha라는 일반 명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부처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처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 할 때의 부처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다. 그는 인도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부처)으로 숭앙 받는 스물다섯의 부처 가운데 맨 마지막 부처인 '싯다르타'이다.

 

스물다섯이나 되는 부처 가운데 온 세계가 오직 싯다르타의 탄신을 기념하고, 오늘날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싯다르타는 온갖 부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이를 마다하고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했고, 35세에 깨달은 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45년간을 왕족, 농부, 성직자, 수행자, 장자(큰 부자를 높여 이르는 말), 평민, 불가촉천민들에게 이르기까지 털끝만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즉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했으며 이를 실천했기 때문에 오늘날 부처의 대명사가 되어 숭배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종교 창시자들 가운데 순수하게 인간으로 남아있길 바랬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후 45년간 불법을 설파하며 주유(周遊)하던 시절, 그를 신으로 떠받드는 무리들에게 여러 차례 말했다. ‘나는 여러분과 똑 같은 사람’이라고. 종교를 창시한 대부분의 교주들이 스스로를 신 혹은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거나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음을 직간접적으로 말했으나 싯다르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신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의 문장가 백낙천이 당대의 선승 도림 선사를 찾아가 불법의 대의를 물었다. 그러자 도림 선사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백낙천은 불법의 대의치고는 너무나 평범한 지라 실망하여 도림 선사에게 다시 물었다. “그 정도야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것인데, 그 외에 달리 가르쳐 줄 것이 없습니까?”

 

도림 선사가 답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는 것이라 해도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이처럼 진리는 아주 쉽고 단순하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삶의 이치도 아주 간단하다. 문제는 실천에 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누구나 깨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설파하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철인과 종교인들이 무수히 많지만 실생활에 몸소 실천으로 옮겨 수행하며 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563년 부처님 오신 날, 화엄경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때린다. ‘하늘에 달이 떠서 천 개의 강에 달이 함께 뜨더라도 그 숱하게 많은 강에 비친 달은 하늘의 달 하나로 거두어진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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