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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태기
06/10/19  

관태기라는 말이 있다. 관계(關係)와 권태기(倦怠期)를 조합한 신조어로 ‘인간관계에 흥미를 잃고 싫증을 느끼는 시기’를 가리킨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단어이기에 기성세대에게는 생소할 수 있어도 공식적으로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공용어이다. 그렇다고 서재에 꽂혀 있는 사전을 들춰서는 곤란하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요즈음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과거 기성세대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 어떤 줄이라도 붙잡고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사회생활의 지렛대로 삼는 생존전략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았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옛 친구나 동창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에게서는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인맥 관리나 유지에 따르는 피로감, 회의감 등으로 관심 밖으로 서서히 밀려나게 된다. 바로 이런 때 관태기가 찾아온다. 물론 새롭게 관계 맺는 것에 부담을 느낄 때도 관태기라고 말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불필요한 일에 시간과 경비, 에너지 등을 빼앗기기 싫다'며 동창회나 친지들의 모임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혈연관계의 친인척들 모임조차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보다 심한 경우는 기존 인간관계를 점검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관계를 잘라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혼자 남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이고, 비연속적이며, 정도가 약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젊은이들의 이렇게 형성된 일시적인 인간관계를 ‘티슈인맥’이라고 부른다. ‘티슈’와 ‘인맥’의 합성어이다. 티슈는 한번 쓰고 버려진다. 즉 필요성에 의해서 관계를 맺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일회성 인간관계를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며 투자가치가 있는지 이해득실 여부를 철저히 살펴본다. 관계성을 지속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계산해서 불필요한 관계는 바로바로 청산하고, 이득이 된다고 예상될 때만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인맥다이어트’라는 말도 있다. ‘인맥’과 ‘다이어트’의 합성어로 번잡한 인간관계에 따른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혹은 바쁜 생활에 쫓겨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내게 어떤 이득이 되는가 여부를 따지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나를 편하게 하고 즐거움을 줄지는 잘 모르겠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고, 따져보지도 않았으나 삭막한 삶임에는 틀림없을 듯하다. 우리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함께 놀던 동네 친구, 중고등학교, 대학 선후배, 동기 동창생들과 자주 만나고, 수시로 연락하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화하며 지낸다. 그 가운데 부부간에 하지 못하는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떤 목적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 그저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관계는 없단 말인가?

 

그렇다고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인간관계를 무 자르듯이 단칼에 잘라내고 이득을 따져서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세태를 탓하고 싶지 않다. 이런 젊은이들의 인간관계를 비판할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어찌 보면 그들의 실용성을 따지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아닌가 싶을 때도 가끔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고 경제적인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인간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생각은 잠시, 집 근처 식당에 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이미 식사를 마친 뒤지만 나를 생각하고 불러준 친구를 위해 한 끼 더 먹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이게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구수한 묵은 장 맛 나는 옛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만남이 좋다. 어떤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구차한가. 손해가 나면 어떤가. 시간을 빼앗겨도 좋다. 돈이 좀 들더라도 상관없다. 즐겁고 유쾌한 만남이 좋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목적도 없이,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진심을 나누는 그런 관계라면 오히려 세상살이에 휘둘려 상처받은 영혼이나 삶에 지치고 병든 마음이 힐링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살다보면 관태기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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