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
07/01/19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발신자의 이름이 뜨지 않으면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발신자 이름은 뜨지 않았지만 전화번호(212-810-1562) 밑에 뉴욕이라고 지명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받을까말까 망설였다. 혹시 뉴욕에 사는 조카가 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조카 손주 돌이라 옷을 한 벌 보냈기에 감사한다는 전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녹음이 흘러나왔다. 한국대사관인데, 전화 받는 분에게 한국정부가 보낸 공문서가 대사관에 있다면서 어떤 공문인가 알고 싶으면 1번을 누르라고 했다. 우편으로 직접 보내면 되는데 왜 대사관을 통해서 보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1번을 눌렀다. 표준말을 쓰는 사람이 받았다. 내가 물었다. 대사관이죠? 상대방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커서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며 소리를 낮췄다. 대사관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어떤 일로 전화하셨어요? 아니 내게 전화해서 한국 정부가 보낸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면서요? 아 예.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이름을 알려주자 잠시 기다리십시오. 하더니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 서울시경찰청에서 나흘 안에 출두하라는데요.

 

그때 이건 말이 안 되는구나. 장난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잘 알았습니다. 하고 수화기를 놓으려는 순간 상대방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 출두해야지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야지요.

 

뭔가 노리고 전화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한국에 전화해서 친지들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라고 할까 하다가 한국은 꼭두새벽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대사관에 확인하기로 했다.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화기에 찍힌 번호를 알려주자 한국대사관 산하 그 어떤 공관에도 그런 번호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는 곳이 LA이니까 LA 총영사관에 문의해보라고 했다. LA 총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사건사고 담당 영사에게 자초지종을 메시지로 남기고 전화를 내게 해달라고 번호를 남겼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 아무 일도 아님이 확실하다. 이번에는 발신자 추적을 위해 내가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고 했다.

 

요즈음 이런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는 언론 보도를 자주 보고 들으면서 나는 절대로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그만 그들의 술책에 빠지고 말았다. 한국 정부에서 보낸 문서를 보관하고 있으니 그 문서의 내용을 알고 싶으면 1번을 누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눌렀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누르는 순간 많은 돈이 전화 요금으로 빠져 나간다고 했다.

 

나는 전화요금으로 돈이 빠져나갈 거라는 것보다도 내가 그들의 수법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런 얕은 수에 빠졌는지 도저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같이 그들에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당신에게 한국정부에서 보낸 공문서가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자신에게 어떤 문서가 왔을까하는 궁금증과 내게 나도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누르라는 번호를 누르지 않겠는가?

 

이처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불법적으로 개인정보를 빼내서 이득을 취하는 범죄를 가리켜서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이라고 한다. 음성(voice)과 개인정보(private data), 낚시(fishing)를 합성한 말로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음성사기전화’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전화사기, 보이스 피싱 수법이 다양해졌고, 희한한 형태로 진화되어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내가 당한 이번 일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의외로 당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방법도 다양했다.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서울시경으로 사흘 안에 출두하라고 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마약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면서 검사가 일단 현재 은행 구좌의 돈을 모두 검찰 구좌로 이체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난 서울시 경찰청으로 나흘 안에 출두하라는 첫마디에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을 알고 끊었지만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예금을 인출해서 그 돈을 금감원 구좌로 입금하라고 해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손실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기꾼들의 얄팍한 수법에 잠시 놀아났다는 생각에 한 주일 내내 불쾌하게 보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얼굴에까지 내 불편한 심기가 나타나고 있는가 보다. 이런 사기꾼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어떤 대책이 없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 말고는 뚜렷한 대책이 없단 말인가?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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