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라면
07/01/19  

언제부턴가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는 날이 많아졌다. 식욕이 전혀 없다던가 입맛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닌데 그다지 먹고 싶은 것을 떠올리지 못하는 거랄까...... 특히 누군가를 만나 외식을 해야할 때, 수많은 식당 메뉴들 중 끌리는 한 가지가 없다는 사실은 뭔가 좀 서글퍼지기도 한다. 어르신들에게 드시고 싶은 음식을 고르라고 하면 자주  "늙으면 먹고 싶은 것도 없어지니 아무거나 먹자!”라고 하셨던 것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말이다. 이것 역시 나이 먹는 증후인가? 

 

얼마 전 영원할 줄만 알았던 라면의 인기가 3년째 시들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매년 소비가 늘어나다가 사상 처음으로 2017년부터 소비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가장 큰 요인은 저출산이라는 것이다. 라면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소비가 많은 세대는 10대와 20대인데 이 연령대가 줄어들면서 라면 소비가 줄었다고 한다. 건강을 중요시하는 웰빙문화나 음식 트렌드가 바뀌어서가 아닌 우리 사회 인구 구조 변화가 근본적인 요인이라니 뭔가 희한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50대 이상의 남성이 소비하는 라면은 10대의 절반, 여성은 3분의 1 수준이라고 하니 10대들의 라면 사랑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기사를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우리집에서 유일한 십대인 첫째 아들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라면을 손꼽는다. 라면을 잘 먹게 된 것이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는데 맵다고 연신 물을 마시면서도 라면을 포기하지 못했다. 요리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끓여주면 공들여 만든 그 어떤 요리보다 맛있게 먹어 치운다. 우리 아이들 학교는 학기말이나 방학식, 종업식 같은 날 담임 재량으로 라면 파티를 한다.  각자 먹고 싶은 컵라면과 젓가락을 학교에 챙겨가서 먹는 것인데 아이들 반응이 꽤나 뜨거운 모양이다.

 

내 인생 최고의 라면으로 기억되는 라면도 내가 10대에 먹었던 라면인 것 같다. 그 당시 우리집도 일반 가정처럼 라면은 기피 메뉴였기 때문에 좋아하는 만큼 자주 먹을 수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어쩌다가 먹는 라면 맛은 몹시 황홀했다. 그 중 최고는 학교 매점에서 사 먹던 컵라면이었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전력 질주 후 손에 쥘 수 있었던 그 라면은 영혼을 달래주던 소울푸드이자 학창시절의 낭만으로 기억된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처음 만든 음식도 분명 라면이었을 것이다. 번번히 물 조절에 실패해서 라면은 싱겁거나 짜거나 맛이 들쑥날쑥 했지만 확실한 건 늘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라면 물이 끓기까지 기다리는 그 잠깐의 설레임과 초조함 또한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가 없는 집에 친구가 놀러오면 라면 하나 끓여서 찬밥을 말아 야무지게 싹싹 비우기도 했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먹어도 절대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요즘도 나는 라면을 싫어하거나 라면을 먹었을 때 맛이 없다던가 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맛이 좀 덜 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십대 때 먹었던 라면만큼 황홀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 혼자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싶을 때 종종 라면을 먹곤 하는데 대충 끼니를 때웠다는 생각이지 만족스러운 감동의 한끼는 물론 아니다.

 

우리집 네 아이들이 모두 십대가 되는 날을 상상해 본다. 지금도 여섯 식구가 먹을 라면을 끓이려면 집에서 제일 큰 냄비가 등장하는데 말이다. 들통에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나, 라면은 열 봉지 정도 끓이면 충분하려나, 냄비를 두 개로 나눠서 끓여야 하나…… 네 명의 십대들과 함께 먹을 라면을 끓일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져 온다. 하지만 분명 맛있을 것이다. 싱겁든 짜든, 불었든 덜 익었든 말도 못하게 맛있게 먹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내 경험과 라면 판매 데이타가 증명했듯이 십대는 라면을 사랑한다. 십대라면 그런 것이다.

 

그럼 나는 그 아이들을 바라 보면서 흐뭇함과 부러움에 젖어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너희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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