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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를린에서
07/29/19  

지금 나는 독일 베를린에 있다. 작년 이맘때는 하와이 호텔 로비에서 칼럼을 썼고 오늘은 베를린 호텔 룸 책상에 앉아 있다. 밤 9시가 지났지만 이제서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고 저녁으로 먹은 정체불명의 맛없는 타코는 아직 소화되지 않았다. 베를린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정확히 19년 전이었던 2000년 여름, 대학에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병원에서 일했던 나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풋내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꿈꿔 왔던 유럽 배낭여행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적금을 붓고 있었고 시간만 나면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같이 가자고 약속했던 친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 둘 여행을 포기했을 때도 나는 굳건히 나의 계획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2000년 여름, 나는 혼자서 베를린을 비롯해 유럽의 9개국, 17도시를 한 달간 여행하게 된다.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면서 다시 베를린에 오게 되리라는 생각없이 작별을 고했건만 나는 다시 이곳에 와있다. 19년 전 그때 그 여행으로 나는 여행에 대한 패러다임을 다시 그리게 되었고 그 매력에 취해 자꾸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나의 여행담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길 가던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체 지나갔지만, 유대인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구해 여관집 주인에게 돈을 주고 그를 부탁했다는 내용이다. 뜻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뜻하지 않았던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 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여행 중에 차마 그 수를 샐 수 없을 만큼 많은 착한 사마리아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스스럼없이 먼저 내게 다가와 나를 도와주었다. 그 당시 나는 어렸고 여자였고 혼자였으며 그 낯선 곳에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들 눈에는 철저한 약자, 마치 강도를 만난 나그네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버스를 놓치고 허망하게 서 있을 때 지나가던 차가 내 앞에 섰고, 지하철표를 어떻게 사는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손에 자기 티켓을 쥐어줬다. 다리가 아파 한 걸음 앞으로 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 어떤 이는 노래를 불러주며 손을 잡고 나를 끌어주었고,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로워질 때면 거짓말처럼 동행 할 친구가 나타났다. 정말 마법과 같은 순간들이었다. 아름다운 명소와 탄성이 절로 나는 경치나 명작들보다 정작 나를 감동 시키고 오래오래 길이 남은 것은 바로 내가 만난 이들의 대가 없는 나눔과 베품이었다. 그리고 이 마법은 여행을 할 때마다 다시 펼쳐진다.

 

나는 오늘 혼자서 베를린 이곳 저곳을 걸어 다녔다. 걷다 지쳐서 길에 세워진 전동 스쿠터를 대여했고 (베를린은 자전거나 전동 스쿠터를 손쉽게 대여해서 목적지에 세워두는 시스템이 편리하게 잘 되어 있음) 마침 차가 다니지 않는 자전거 도로가 길게 뻗어 있길래 연습하기 안성마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도를 해봤다. 한 5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달려보고 다리를 올려 보기를 여러 차례, 도무지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전거와 비슷한 원리로 속도가 붙으면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게 된다는 것은 이해했는데 속도가 붙으면 겁이 나서 이내 보드 위에서 내려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그늘 한점 없는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독일은 지금 역대 최고의 폭염으로 시름하고 있음) 도로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뒤에서 “Do you need help?”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세미 캐주얼 복장으로 출근하는 듯한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스쿠터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걸어오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먼저 말을 건네 온 모양이다. 매우 부끄럽고 당황스러웠지만 무턱대고 거절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본인이 시범을 보여줘도 되겠냐고 물은 후 능숙한 자세로 스쿠터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의 문제점도 지적하며 다시 해 보라고 했다. 몇 차례 시도를 해보았고 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쉽게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설상가상 보드 위에서 지탱해야하는 오른발에 힘이 빠지면서 한 발로 딛고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졌다. 뜨거운 태양은 자비가 없었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으로 티셔츠가 젖고 있었다. 드라마처럼 갑자기 등장한 훤칠한 남성의 도움으로 스쿠터 타기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이 나는 애석하게도 스쿠터 타기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뚜벅이 신세로 종일 걸어야 했지만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어디선가 또 마법처럼 나타난 착한 사마리아인의 등장으로 오늘도 나의 하루는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여행에서 만난 착한 사마리아인들은 내 여행을 완성하는 황금키이고 마지막 퍼즐이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불안과 불편을 동반하고 불확실한 것에서 오는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안겨주지만 이때 마법처럼 만나게 되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은 여행에 숨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여행을 꿈꿀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매번 여행을 마치고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며 “아…… 집이 제일이구나!”를 외치지만 이내 다시 여행을 꿈꾸고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새로운 마법을 펼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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