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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熱河日記]
08/05/19  

지난 주말 올해 8순이 된 선배가 초청한 자리에 참석했다. 일 년에 몇 차례씩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등,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선배다. 요즈음에는 사진에 빠져들어 각종 렌즈를 구입했고 이곳저곳 출사도 다니고 있다. 그 선배가 '열하일기' 읽은 사람이 있는가 물었다. 참석자 일곱 명 중에 한 분이 얼마 전에 읽었다며 손을 들었다. 선배는 최근에 읽었다면서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그 책을 읽은 뒤로는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게 되었고, 여행 중에 무심코 지나치던 언덕이나 구릉, 봉우리, 호수, 강 등의 지형이나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봄 한국에서 사온 책들 속에 들어 있으나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내가 사온 책은 고미숙, 김진숙, 김풍기 세 사람이 번역했으며 북드리망에서 출판한 것으로 상하 두 권으로 나뉘어 있다.

 

1780년,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 대륙을 여행할 기회가 찾아왔다. 건룽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신으로 가게 된 박영원의 개인수행원이 된 것이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렇다 할 직업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박지원을 딱히 여긴 8촌 형 박영원의 배려였으리라. 알다시피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태생의 뛰어난 인재였지만 벼슬길을 마다하고 제도권 밖에서 유유자적하던 사람이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연경, 연경에서 열하, 다시 열하에서 연경으로 총 3천 리가 넘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가히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과 수난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기간 동안 겪은 일을 연암의 박학다식에다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곁들여 지루하지 않게 서술했다. 특히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연암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으며 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슬며시 내놓았다.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으나 당시 세력가들은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뜻있는 사람들끼리 몰래 돌려가며 읽기 위해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찾은 봉황산을 바라보며 삼각산, 도봉산과 비교하여 설명한 부분에서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어려서부터 자주 오르던 동네 뒷산처럼 느끼던 삼각산과 도봉산을 28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예찬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지금도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자주 찾는다. 지난봄에도 삼각산을 세 차례나 찾지 않았던가. 필자의 모교 교가 첫마디가 '삼각산 높은 봉은 기상이 씩씩하고'이다.

 

다음은 박지원이 봉황산을 묘사한 글이다.

 

봉황산을 바라보니 흡사 돌로 만들어 놓은 듯 평지에 우뚝 솟아 있다. 손바닥에 손가락을 세운 듯, 연꽃이 반쯤 피어난 듯, 하늘 끝 여름 구름인 듯, 빼어난 산봉우리를 도끼로 깎아 놓은 듯 무어라 형용키 어렵다. 다만, 밝고 윤택한 기운이 없는 것이 아쉽다.

 

이어서 박지원은 삼각산과 도봉산이 금강산보다도 낫다고 생각해왔음을 밝힌다. ‘1만 2천 봉, 기이하면서도 험준하고 웅장하면서도 깊지 않은 곳이 없는 금강산이지만 하늘에 닿을 듯한 배어난 빛과 몸에서 솟아나는 윤기 나는 자태가 없다’면서 저녁 무렵 한양의 삼각산과 도봉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하늘을 어루만지며 솟아난 푸른빛, 희미한 남기(嵐氣)와 옅은 노을에 밝고 아리따운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바로 ‘왕기(旺氣). 왕기(旺氣)는 왕기(王氣)’라면서 ‘우리 서울은 억만년토록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를 갖추고 있으며, 그 신령스러우면서도 밝은 기운이 여타의 산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끝으로 박지원은 지금 기이하고 우뚝 솟아난 봉황산의 형세가 비록 삼각산이나 도봉산보다 높긴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빛과 기운은 한양의 여러 산에 절대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연암 박지원이 필자가 자주 오르는 마운틴 발디나 산골고니오 마운틴을 찾는다면 어떤 기록을 남길지 궁금하다. 마운틴 발디나 산골고니오는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이다. 백두산보다 높은 산으로 삼각산, 도봉산보다는 네 배 정도 높은 산이나, 그 아름다움과 산의 자태가 훨씬 맛이 덜함은 물론 뿜어나는 기운도 삼각산, 도봉산만 못하다. 연암의 기록을 남겨본다.

 

발디나 산골고니오가 비록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으나 그 빛과 기운이 삼각산이나 도봉산처럼 밝지 못하다. 무릇 명산은 산세나 준령, 계곡, 봉우리 등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뿜어 나오는 기운과 사람들 가슴속에 던져주는 빛의 밝기로 정해진다. 너무 낮지도 않고 지나치게 높지도 않으며 적당히 경사도 있고 계곡에 물이 흐르며 그러면서 맑고 밝은 기운이 넘쳐나는 삼각산, 도봉산이 진정한 명산이며 허약한 심신을 어루만져주는 약산(藥山)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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