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라도
08/05/19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 여행의 피로도 여운도 가시지 않은 채 일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가는 중이다. 바로 엊그제까지 베를린 도시를 전동스쿠터로 종횡무진하고 스위스 알프스산맥을 산책했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 벌써 그리워지는구나……

 

O형인 나는 타고난 사교성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불확실하고 낯선 환경에서 굉장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대학 강의실에서도 늘 같은 자리에 앉았고 운전을 할 때도 늘 가던 길로 가는 것을 선호하며 주차도 같은 자리에 하는 편이고, 쇼핑도 늘 가는 매장만 가는 타입의 사람이다. 인간관계는 두말하면 잔소리로 친한 친구들은 죄다 20년, 30년의 인연을 자랑하며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편이다. 낯선 환경에서 애써 태연한 척 애를 쓰지만 나 자신만큼은 속일 수가 없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면서 몸소 체험하건데 여행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뭔가 굉장히 과감해지고 부담이 덜 하다라고 할까…… 함부로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관계를 구축할 필요 없고 마음에 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분에 따라 나를 보여줘도 별 상관이 없다. 여행 중 만난 이들은 나를 보고 “쟤가 왜 저래?” 하지 않고 설사 그런 생각을 한들 크게 상관이 없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보다 더 편하게 느껴질 때도있다. 처음 보는 택시 기사나 미용사 앞에서 한껏 고민 상담을 하거나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속속들이 해본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곳곳에서 만난 택시 기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인데 우리나라 기사들은 주로 정치 이야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편이고 외국 기사들은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나는 미국에서 우버 차량 서비스를 이용하며 운전 시작한지 삼일째라는 싱글맘, 대학 다니며 밤에 운전하는 청년, 부수입을 위해 운전을 시작했다는 50대 여성 등등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때로는 그들과 어느 누구를 험담하기도 했고 매우 사적인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아무여도 괜찮고 아무라도 될 수 있다. 평소에는 인정받길 원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며 살아가느라 늘 고단하지만 여행 중에 나는 그저 아무라도 괜찮은 여행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좋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으로의 복귀와 동시에 아무라도 괜찮은 날들도 끝났다. 이제 나는 네 아이의 엄마로 또 내 이름 석 자로 다시 꿋꿋이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아무라도 될 수 있는 여행 길에 다시 오르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힘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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