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08/12/19  

연쇄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 전역이 공포에 휩싸여 있다. 총기 난사란 목표물을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총기를 아무 곳에나 마구 쏘는 행위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가리킨다.

 

8월 3일 텍사스 엘파소에서 총기 난사로 20명이 숨지고 26명이 다쳤다. 다음날 미 동북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10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치는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7월 25일, 캘리포니아주 샌퍼낸도밸리에서 4명의 희생자를 낸 후 불과 열흘 사이에 무려 7건의 총격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근처의 길로이, 위스콘신주 치페와 카운티, 미시시피주 사우스에이븐, 텍사스주 엘파소, 오하이오주 데이턴까지 총격으로 무려 46명이 죽고 70여명이 다쳤다.

 

급기야 트럼프 대통령이 나섰다. 총기 난사를 야만적 공격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 악의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백인우월주의와 편견을 규탄하면서 이런 사악한 이념은 척결되어야 하고 미국에서 증오가 발붙일 곳은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증오에 기반을 두어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범죄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사형 집행도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하는 새로운 법을 법무부가 제안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치밀한 신원조회를 통해 위험인물의 총기류 구입 및 소지를 규제하고, 위험인물이 소유하고 있는 총기를 회수할 수 있도록 하는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초당적 협력으로 통과시켜 달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폭력적 비디오 게임 등에서 나타나는 폭력미화 풍조의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법무부가 소셜미디어 업체들과 협력해 증오심을 갖고 대규모 살상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사용자를 포착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총이 아니라 정신질환과 증오라고 말해 총격사건의 원인을 사용자의 문제로 규정했다. 과연 방아쇠를 당긴 사람의 정신질환과 증오만이 문제인가? 만일 총기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민 초기, 미국에 와서 사귄 한 친구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총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친구는 권총 2정을 내놓으면서 자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반짝반짝 빛이 나게 잘 닦여져 멋진 케이스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보고 친구는 총알이 장전되지 않았다면서 만져보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권총 자체를 들고 있기 싫었다. 몇 년 뒤에 그 친구는 총으로 부인을 위협했으며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부인을 겨냥해서 쏘지는 않았지만 천정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다. 총을 발사해서 이혼한 것인지 이혼을 원하는 부인을 위협하기 위해 총을 쐈는지는 모르지만 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총을 발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 한 사람은 부인이 지병으로 숨지자 장례를 마치고 며칠 뒤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람 역시 총이 없었다면 죽음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총이 없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 규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언급하지 않았다. '일부 정신병자의 소행' '인터넷 게임의 폭력성' '범죄자 처벌' 등을 운운한 것은 살상 무기가 규제 없이 유통되는 현실을 외면하고 변죽만 울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총기 참사에 대해 형식적인 발언만 되풀이 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 알다시피 미국총기협회(NRA)는 매년 2억 달러에서 3억 달러를 로비와 홍보를 위해 지출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 관료, 의원, 법관 등 사회 지도층 인사 550만 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정치인의 협조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관리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2016년 대선 때, 약 3,600만 달러를 후원받은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2월 플로리다 파크랜드 사건 등 그동안 대규모 총기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총기 규제 강화 지지를 선언했지만 그저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이번에도 NRA는 총기 규제 강화를 시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신의 지지자들은 당신의 이런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경고를 보낸 바 있다.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비영리단체 Everytown for Gun Safety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일 100명이 총기로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연재해로 사망하는 사람들보다 총기 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나라 미국이라고 말하지만 온 국민이 무방비로 총기에 노출되어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미국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현행법과 제도로는 안 된다. 강력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우선 계류 중인 ‘총기 소유자 신원 조회 강화 법안’의 상원 통과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번 총기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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