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부르는 향수
09/09/19  

아침 출근 길, 가을 장마라도 온 것인지 며칠째 비가 오다 말다를 계속한다. 이틀 후 태풍 링링까지 북상한다고 하더니 정말 하늘이 심상치가 않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탓인지 여유 있게 집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집에서부터 7-8분쯤 걸어 지하철역 부근에 다다랐다. 누군가 내 옆을 스치며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가는데 습한 바람을 타고 익숙한 시트러스 향이 훅 하고 내 후각을 자극한다.

 

Calvin Klein 브랜드의 향수 CK one이었다. 너무 익숙한 향수인데 대략 20년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코를 자극하던 향은 곧 나의 가슴까지 파고 들었다. CK one은 1994년 앞서가는 시대 감각을 풍미하며 최초의 유니섹스 향수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젊은 층의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향수 광고를 보면 9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 방식과 자유로운 가치관을 반영하며 그들과 함께 성공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전히 CK one은 Calvin Klein의 간판 향수라고 알고 있지만 역시 최고의 전성기는 90년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시절 향수하면 CK One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유니섹스 향수답게 ‘공용’으로 제작되었지만 여성보다는 남성을 떠올리게 되며 실제로 내 주위에서도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훨씬 선호하는 향수였다.

 

그 당시 CK one을 뿌리며 겉멋을 잔뜩 부리던 10대 청소년들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다. 재작년에 10대 때부터 알고 지낸 성당 동생의 아기 돌잔치에 갔다가 10대 때 알았던 사람들을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삐쩍 마른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쫄티를 즐겨 입던 청소년들은 어느새 너나할 것 없이 제법 자리잡은 배를 가리기 바쁜 중년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별은 내 가슴에” 드라마 속 안재욱 머리 스타일에 깔끔한 미소년 이미지였던 A가 훤히 드러난 이마에 넉살 좋은 아저씨처럼 껄껄 웃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는 무심한 세월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 옛날이여~!

 

90년대에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 또는 이민 온 또래 한인들이 참 많았다. 나는 학교나 종교기관을 통해서 그들을 만났을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는 사춘기 탓이었는지 타국에서 살아가는 서러움 때문인지 다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쓸데없이 외로움에 사무쳐 슬퍼했다. 가뜩이나 한창 예민한 10대인데다가 문화적, 언어적 변화와 갈등을 겪으며 불안한 감정은 더욱 극대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의 슬픔은 그 모양과 색깔, 온도가 달랐지만 비슷한 향을 풍기며 묘한 동질감으로 우리를 한데 모았다.

 

오늘, 지나가던 낯선 이에게 풍겨온 향수는 잔잔한 내 가슴에 조약돌을 던져놓고 10대 때 함께 웃고 울었던 전우같은 벗들을 한 명 한 명 기억해 보라 한다. 나에게 CK one은 젊고 산뜻하지만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10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이다. 그리고 곧 틴에이저가 되는 우리 큰 아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향수이기도 하다. 어느 부모처럼 내 아이에게 요란한 스펙과 배경을 대신 만들어줄 순 없지만 아무 이유 없이 고독한 그의 10대를 맹렬히 응원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향수 가득한 향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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