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에서
09/16/19  

한달에 두세 번은 하루 평균 20만 명 이상의 승하차 인원이 몰린다는 잠실역 부근에서 외국인 관광객 안내 봉사를 한다. 강남역에 이어 전국 2위의 승하차객 수를 자랑하는 역답게 정말 말도 못 하게 많은 인파가 오고 간다. 이곳에서 별의별 사람들, 다양한 문의와 사건 사고들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간다.

 

이 역의 주된 이용객은 롯데월드 및 롯데월드타워 상권을 찾아오는 관광객 및 쇼핑객들, 잠실 역세권에 사는 근처 주민들, 그리고 송파, 강동에서 넘어오는 버스 환승객들이다. 외국인들은 롯데월드나 롯데월드타워 위치, 승차권 구매 문의가 가장 많고 내국인들은 버스 환승역이나 8호선, 화장실 위치 문의도 많이 한다. 불과 일년 전에는 나도 이런 문의를 하며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어느덧 길 안내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워낙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남들은 힘들다며 선호하지 않는 잠실역 외부 근무를 꽤 즐기는 편이다.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미인들도 종종 지나가고 개찰구 앞에서 부등켜 안고 영화 찍는 커플들도 자주 목격한다. 낮술 마시고 취해 주정하는 취객들도 있고 쓰레기통 못 찾겠다며 슬그머니 쓰레기 투척하고 사라지는 얌체들도 있다. 생각보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도 많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경로 우대 지하철 카드로 무임승차를 시도하다가 걸려 30배의 벌금을 내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잠실역에서 서너 시간 안내 봉사를 하다 보면 정말 제대로 사람 구경을 하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며칠 전 개찰구 근처에서 안내를 돕다가 8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쓰러지시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걷던 할아버지는 앞으로 꼬꾸라지듯 쓰러지셨는데 그때 할아버지 근처를 걷던 세 명의 청년들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할아버지 곁으로 뛰어왔다. 한 명은 본인이 들고 있던 짐마저 내팽개친 채 역무원을 불러오겠다며 뛰어갔고 다른 두 명은 쓰러진 할아버지를 부축해 기대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의식이 있으셨고 대화를 통해 구급차나 보호자 호출은 원치 않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청년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않고 역무원들이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달려와 아무런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모습은 공익광고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의인은 모두 사라진 세상이라고, 괜히 사람 잘못 도왔다가는 큰일난다고 말하는 요즘이다. 지난 5월인가 어떤 할머니를 대신해 빵집의 문을 열어주다가 할머니를 숨지게 한 30대가 경찰에 입건되는 일도 있지 않았던가. 이 청년은 어느 할머니가 빵집에 들어가려던 중 출입문을 잘 열지 못하자 문을 대신 열어주다가 할머니를 넘어뜨렸고 할머니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뒤 숨졌다. “도와주려고 한 행동이지만 결과에서는 자유롭지 않아 입건하게 됐다”는 경찰 측 주장이 틀리지 않지만 뭔가 오랫동안 마음이 착잡했던 뉴스였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 할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는지 끝까지 확인하지 못한 채 역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잠실역에서 만난 착한 사마리안과 같은 의로운 청년들을 보니 이래서 세상은 아직 살만 하구나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리 암담하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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