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을
04/23/18  

대한민국의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산은 오색 단풍으로 단장하고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드는, 딱 보기에도 황홀한 가을이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이십여 년 동안 늘 이런 가을 풍경을 동경해 왔고 어쩌다가 땅에 떨어진 단풍잎이라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었다.

 

가을이 되면 나는 늘 열세 살 무렵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그 당시 매주 금요일인가 아파트 단지 앞으로 도서 대여 트럭이 오곤 했었다. 집 주변에 따로 도서관이 없었던 시절이라 이동식 도서관쯤 되었던 도서 대여 트럭의 존재는 나에게 참 특별했다. 도서 대여 트럭의 아저씨는 내 나이 또래들에게 인기 많은 책을 추천해 주기도 하셨고 한참을 못고르고 망설여도 사람 좋은 얼굴로 기다려주시곤 했다.

 

 그날은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붉은 계열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밖으로 나왔는데 공기가 어찌나 차가운지 콧끝이 싸해지고 눈물이 핑돌았다. 재킷을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몸을 움츠리고 빠른 걸음으로 도서대여 트럭으로 향했지만 책을 빌리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즐거웠다. 더구나 트럭에 도착하자 소녀 감성 저격하는 책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하고많은 가을의 기억 중 나는 이날의 공기와 느낌을 뚜렷이 기억하며 내내 그리워했다.

 

그래서 이십여 년만에 다시 느끼는 한국의 가을이 참 좋다. 밖으로 나가면 싸늘한 공기와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깡총깡총 낙엽 위를 뛰어다니는 소리도 좋고 고개를 어느쪽으로 돌리든 가을임을 증명해주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얼마 전 택시를 탔을 때 "요즘 날씨 참 좋죠?" 라며 신이 나서 기사님께 인사를 건내자 말 끝나기가 무섭게 "네? 요즘 미세먼지 장난 아닌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대꾸했다. 과연 그랬다. 창밖을 내다보니 과연 하늘이 뿌옇다. 뉴스에서 이야기하는 미세먼지 농도 따위는 아직 그다지 내 마음속에 와닿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리워한 한국의 가을 풍경을 즐기는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긴 탓이리라.


가을의 차가운 공기는 어쩐지 내 마음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가을이면 누구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나를 늘 애태우는 사랑하는 이도, 하루종일 목이 쉬게 소리 지르게 만드는 아이들도, 끊임없이 움직여도 티도 안 나는 집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가을은 늘 내 마음을 관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을은 늘 짧게 그리고  아쉽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다음주부터는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옷장을 열어 보니 온통 여름 옷 천지고 그나마 긴 소매 옷들도 얇은 재질이 대부분이다. 따뜻한 캘리포니아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에 매서운 한파를 견뎌낼 겨울옷을 산 적이 없었던 탓이다. 카디건이나 간절기 외투만으로도 충분했던 캘리포니아 겨울에 길들여진 나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맛볼 한국의 겨울 추위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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