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라면?
10/14/19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후배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문자를 보냈다. 후배는 내게 한국에 있냐며 만나자고 했다. 당장 뛰어올 기세였다.

 

1983년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계약금을 내고 중도금, 잔금 등을 내야 하는데 재산이라고 해야 계약금 주고 조금 남은 돈과 11평 임대아파트가 전부였다. 아파트를 팔아야 중도금, 잔금 등을 낼 수 있었으며 약간 부족한 돈은 은행 융자까지 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때 후배가 과천의 자기 아파트에 전세 사는 사람을 내보내고 내게 살라고 했다. 돈 한푼도 안 내고 일 년을 살았다. 덕분에 별 문제 없이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8일부터 10일까지 2박3일 제주도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 상경하는 당일(10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예정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혹시 예약자 중에 후배의 이름이 있는가 물으니 이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후배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학 다닐 때는 내가 4학년이고 후배가 1학년인지라 서로 교류한 적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와 한 재단의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어 알게 되었으며 보이스카우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세월이 4반세기나 흘렀지만 후배는 여전히 그때의 풍채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한 번 얘기를 시작하면 그치지 않고 계속했다. 남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 얘기했다. 뭔가 중간에 한 마디 하고 싶어도 후배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후배는 너무나 할 얘기, 밀린 얘기가 많았다. 후배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내가 했다고 하면서 얘기들을 쏟아내었다.

 

어릴 적 내 아들, 딸의 모습을 떠올렸고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여행했던 까마득하게 먼 옛일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달리는 열차처럼 멈추지 않고 25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이야기하기 위해 말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귀를 세우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소곡주 댓 병이 비워져 가고 있었다. 안주도 먹지 않으면서 술잔을 자주 비우던 후배가 갑자기 울먹이며 작년 9월 이후에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르치던 고교 3학년 여학생이 수업 중에 자신의 발언을 문제로 성추행했다며 SNS에 올리기 시작하더니 큰 반응이 없자 청와대 게시판에 올렸다고 했다. 그러자 언론에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고, 교육위원회에서 소명하라고 했다. 경찰에서 내사에 들어갔으며, 교육위원회에 불려가 청문인터뷰도 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곤궁에 빠지자 평소 그의 성품을 알고 품행을 잘 알고 있었던 동료교사, 학부형,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탄원서를 각계각층에 올렸고, 실제로 그런 사실이 없었음이 밝혀졌으나 후배는 심신이 황폐해졌고, 지난 40년의 교편생활에 대한 회의까지 밀려와 자살을 생각할 정도가 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을 무고한 학생을 고소해야 하는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서 학생을 무고죄와 모욕죄로 고발해서 벌을 받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경우 학생이 대학 진학은 물론 이후 그가 받게 될 고통을 생각하니 망설여졌다는 것이었다.

 

후배는 내게 물었다. “형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내가 어떻게 했을까 보다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줘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고심했다. 생각하고 있는 내게 후배는 계속 물었다. “형이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 마음이 편안해지는 편을 택하라고 했다. 그러자 큰 소리로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자신을 편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몰아세웠던 학생과 이 학생에 동조해 자신을 비방했던 학생들과 교사들, 학부형들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덮으려니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자신이 받았던 고통이 큰데 그저 무혐의로 벗어난 것에 만족하며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아직도 감정이 격해질 때면 약을 복용해야만 한다면서 울먹였다.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