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10/14/19  

결혼 선물로 받은 믹서가 고장났다.  수박이 영 달지 않고 심심해서 설탕과 얼음을 첨가해서 주스나 만들어 먹을까 싶어 재료들을 모두 믹서에 집어넣었는데 파워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이미 재료를 모두 넣은 터라 일이 좀 번거롭게 되었네 싶었지만 실은 결혼 선물이었던 믹서가 고장난 게 마음 쓰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결혼 십 년이 지나면서부터 가전제품이고 가구고 하나둘 고장이 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겉잡을 수가 없었다.

 

애지중지했던 그릇들은 이가 나가기 시작했고 하다못해 냄비나 프라이팬 손잡이 나사가 느슨해지더니 누렇게 변색되거나 묵은 때가 지워지지 않는 물건들도 늘어갔다. 이십대 초반부터 연애를 시작해 신혼부부, 아기 엄마 아빠였던 것이 바로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덧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흘렀고 우리가 함께 장만했던 많은 것들은 삐그덕거리거나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평생 사용할 것처럼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또 고른 제품들이건만 한번 고장이 나기 시작하니 나름 손재주가 좋은 공대 출신 남편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믹서를 새로 장만하고 (진짜 1년에 한두 번밖에 안쓰는데 없으면 아쉽다는) 가전제품도 몇 번씩 교체되었지만 다행히도 남편만은 아직 내 곁에 있다. 물론 ‘햐아~ 예전 같지 않군. 참 많은 게 변했어’라고 종종 생각하긴 하지만 부부의 연이 길어질수록 분명 더 좋아지는 것들도 있다. 그 중 제일은 편안함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는 구구절절 많은 말이 필요 없다.  표정, 몸짓, 아니면 간단한 단어들만으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얻은 놀라운 성과이자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 만난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오랜 세월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제법 괜찮은 인연임을 증명해준다. 그렇게 말이 필요 없는 편안한 사이가 되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솔직하게 나누고 침묵을 공유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런 인연을 어렵지 않게 술술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학벌이나 재산, 능력과 상관 없이 그는 꽤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년에 두어 번 미국에서 친정 아버지가 서울 우리집을 방문하시는데 어찌나 바쁘신지 점심, 저녁 약속은 기본이고 가끔은 아침부터 안 계셔서 얼굴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중고등학교 동창생들, 대학교 동창에 선후배, 전 직장 동료들, 제자들, 친인척,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에 호불호가 생기고 편협해진다고 하던데 우리 아버지는 예외인 모양이다. 그렇게 평생 인연을 소중히 여기신 아버지 곁에는 항상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더니 급기야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나도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인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연은 시작이자 마지막이고 전부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줄 알지 못하고,

보통사람은
인연인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줄 안다.

  • 피천득님의 <인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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