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도 도네
10/21/19  

2019년 달력이 달랑 두 장밖에 남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과 새해 덕담을 주고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눈 깜짝하는 사이에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린 것이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뭔가 마음이 심란해지고 어딘가 조급해진다. 대체 나의 2019년은 어디서 어떻게 어디로 흘러 갔단 말인가…… 언제부턴가 새해 계획도 뚜렷하게 세우지 않고 작년같은 올해, 올해같은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당연시된 것만 같아 속상하기 짝이 없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문득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이 노래 가사처럼 나는 봄이 오고 또 다른 봄이 올 때까지 사계절 내내 분명 쉴 새 없이 미싱을 돌렸다.

 

아침이면 인간 알람처럼 일어나서 네 명의 아이들을 위해 아침을 차렸다.  “빨리 먹으라!”는 소리를 일곱 번쯤 했을 때 식사가 끝나고 아이가 넷이다 보니 “세수하고 양치하라!”는 소리를 최소 네 번은 해야 아침 준비가 끝났다.  아이마다, 요일마다 다른 스케줄에 준비물을 챙기고 날씨에 맞게 스케줄에 맞게 복장을 갖췄는지도 확인하면 비로소 준비가 끝났다. 이렇게 준비를 마칠 때까지 나는 보통 서른 번 참고 열다섯 번 소리를 질렀다. 끝도 없이 돌아가는 6인의 설거지와 빨래는 예삿일인 양 해치웠고 이놈의 집구석은 어찌된 일인지 하루에 두 번씩 베큠을 해도 금새 발바닥이 시커머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식구들의 감정과 씨름하느라 내 마음 따위는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집안일이라는 가위를 들고 양육이라는 천을 자르고 엄마라는 옷을 만들고 또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작업한 그럴 듯한 옷 한 벌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급 우울해져 온다.

 

영어 공부를 하자니 수학이 더 심각한 것 같고 수학 공부를 하자니 수학은 기초부터 글러먹어 지금 해 봤자 너무 늦은 것 같고 그래도 국·영·수이니 국어책도 봐야만 할 것 같아서 이 책 저 책 열심히 책만 펼치다가 볼 장 다 보던 시험 전날과 비슷하다. 이것도 저것도 완벽히 끝내지 못한 채 잠자리에 누우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불안감이 몰려오면서도 차라리 모든걸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었다. 시험 전날의 그 불안과 기대가 바로 오늘날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고 혼란스럽고 어렵다.

 

그런데도 이 놈의 미싱만은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이는 정녕 엄마의 숙명인 것인가? 아무리 불안하고 혼란스러워도 엄마의 미싱만은 멈출 기미가 없다. 심지어 나는 이 글을 마감하고 정확히 다섯 시간 후에 기상해서 언제나처럼 아이들에게 “빨리 먹으라!”는 소리를 일곱 번쯤 하고 있을 것이고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세수하고 양치하라!”는 소리를 최소 네 번은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을 먹이고 돌아서면 점심 메뉴를 고민할 것이고 한시라도 내가 잊고 있을까 쉴새 없이 “엄마!”를 불러재끼는 네 명의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를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다.

 

그래, 꽃밭에 꽃이 가득하고,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땀이 흐르고, 낙엽이 떨어지고, 흰 눈이 소복소복 쌓여도 언제나 미싱은 쉴새 없이 돌고 또 돌았다. 2019년 남은 두 달 역시 우리 집 미싱은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게 또 푸념하며 새해를 맞을지언정 미싱은 아무렇지 않게 잘도 돌아갈 것이다.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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