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진행일평생(現在進行一平生)
11/04/19  

친구가 도올 김용옥의 ‘슬픈 쥐의 윤회’라는 책을 선물했다. 작가가 이미 여기 저기 발표했던 글들을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 없이 모아 놓은 책이다. 그 책의 ‘삼십여년일순간三十餘年一瞬間’이라는 단편에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작가에게 초등학교 시절 함께 놀던 친구의 전화가 왔다. 친구가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이 때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현재는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미래의 창조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서 동결되어버린 군상들과 과거 이야기를 되씹고 앉아있다고 하는 무의미성은 나에겐 퍽이나 곤혹스러운 것이다. 나는 친구가 더 이상 전화 안 해주기를 바랐다.’

 

지난 일을 곱씹기보다는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현재를 살겠다는 작가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였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다.

 

중학교 시절, 일곱 명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학교 입학 성적이 우수한 친구들이었다. 수석, 5등, 7등, 10등으로 입학한 모두 학업성적이 빼어난 친구들이었다. 그중에서 필자의 성적이 가장 낮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1학년 1학기 성적에 의하면 등수를 끝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빨랐으니까. 그러나 졸업할 때는 모두 성적이 비슷해졌다. 노느라고 공부가 뒷전이다 보니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필자와 중·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기도 한 친구는 대학 졸업 후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했다.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축하한다고 하자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두 해 더 일하면 퇴직해야 한다면서 승진한 것을 기뻐하기보다 직장에서 쫓겨날 일을 걱정했다. 한국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한 심경을 토로하곤 했다. 승진한 이듬해 친구는 평생 몸 바쳐 일해 온 회사로부터 퇴직 통고를 받았다. 친구는 매일 술을 마셨다. 세상을 떠나던 날도 옛 부하 직원들과 술을 마셨고 집에서 홀로 자다가 누워 있던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12년 전 이맘때 일이다.

 

중학교 수석으로 입학했던 친구는 연락이 없다. 친구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만나곤 했는데 필자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소식이 끊겼다. 또 한 친구는 뒤늦게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생활을 거쳐 지금은 자기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7명 중 유일하게 한국에 살고 있다. 친구는 15년 전쯤 중국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방문하는 필자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전해주라며 건네주기도 했다. 친구가 사업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도우려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미국 사는 친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접을 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머지 넷은 모두 LA 인근에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시카고에 살다가 80년대 말에 LA로 이주했다. 그 중 한 명은 최근에 소식이 두절되었고, 다른 한 친구는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미국에 갈 거라고 했는데 우리가 대학 2학년 올라가던 해 봄에 미국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자도 미국 정착이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민 초기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을 보살펴 주었다. 단 한 번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어렵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도와주었다. 한국에서 크게 사업을 하던 한 친구는 1997년,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친구는 2010년 경 LA로 이주했다. 친구들이 가까이 살고 있지만 생활에 쫓겨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집안의 경조사 때나 얼굴을 보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송년회를 겸해서 만나곤 했다.

 

몇 해 전,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부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짧은 기간 머물다 갔지만 친구 덕분에 이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한 친구가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예배도 보고, 바닷가도 찾고 공원에서 BBQ도 하고 골프도 쳤다. 그리고 친구를 모임의 회장으로 선출했다. 한국에 살지만 회장이 된 친구는 해마다 LA를 방문한다. 그뿐만 아니라 LA 모임이 있다고 연락하면 꽃을 한아름 보내오기도 했다. 이 친구가 11월 중순 LA를 방문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골프 일정을 잡았고, 친구들 몇몇은 데스밸리를 함께 가겠다고 하며, 필자는 친구의 기호에 맞춰 박물관이나 공원을 안내할 계획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그저 좋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의 심신은 지치고 늙어가지만 그 친구들이 있는 한 우리의 젊은 날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의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을 기억하는 증인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이 과거에 동결된 것이기는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가 어디 있으며, 현재 없는 미래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빛나는 청춘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으며, 오늘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기에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친구는 동결된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연결해주는 관계의 흐름인 셈이다.

 

대학자인 작가가 어릴 적 친구는 과거에 이미 동결된 존재이며, 그들을 만나는 시간은 자신의 미래 창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가치로 평가해 볼 때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 그런 생각을 가진 그는 친구 만나는 시간 아껴서 연구 많이 하시라하고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는 필자는 오랜 친구이건 수십 년 만에 나타난 과거의 얼굴이건 다 동행하는 친구로 반갑게 맞으면서 미래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가겠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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