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뿌리
12/09/19  

최근 들어 유튜브나 페이스북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영상을 보기 시작하니 묘하게도 과도하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중 "부부수업 파뿌리"라는 영상을 몇 차례 본 이후로 일부러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어느새 자동으로 인도 당해 유사 동영상이 줄지어 뜨기 시작했다.

 

"부부수업 파뿌리"는 이제는 종영된 프로그램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부부 버전이라고 할까. 문제가 있는 부부들을 관찰 카메라로 관찰하고 전문가가 솔루션을 제공한 후 마지막에 부부가 계속 함께할지 갈라설지를 선택하는 식이다. 내가 주로 보는 것은 10-15분짜리 영상으로 아마도 가장 자극적인 관찰 영상들이겠지만 정말 가관인 부부들이 많다.

 

남편과 아내가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갑자기 둘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더니 말투가 험악해지고 이내 쌍욕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진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신 공격에서부터 서로 작정한 듯 상처 주는 말을 퍼붓기 시작하고 표정이며 언어와 행동도 매우 난폭해진다. 대다수의 남편들은 아내를 때릴 듯이 겁을 주다가 성질을 못 이긴 듯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고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가버리거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내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오열한다. 그리고 엄마 주변을 아이들이 불안한 듯 서성인다.

 

부부들마다 사연은 조금씩 달랐지만 위처럼 패턴은 비슷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되고 조금씩 강도가 세져서 더욱 난폭한 싸움이 되고 그러다가 늘상 나오는 레퍼토리가 등장하고 이는 마치 기름을 퍼붓는 효과로 결국 부부 모두 초흥분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둘 사이에 미래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신기한 건 모든 부부들이 어떻게 만나 결혼했는지를 이야기할 때면 저마다 나름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어 결혼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철천지원수처럼 보이는 이들도 한때는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했던 연인들인 것이다.

 

올해로 결혼 15주년이다. 연애 기간까지 합치면 내가 살아온 인생의 절반 정도를 남편과 함께 한 셈이다. 우리도 좋아 죽겠던 날들뿐 아니라 각자 본인이 더 힘들다며 서로를 원망했던 날들도 지나왔다. 우리에게는 관찰 영상만 없다 뿐이지 막상 까보면 우리도 TV에 나오는 문제 부부들 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부로 살다 보면 생활을 공유하니 일상에서 오는 삶의 스트레스들로 매순간 사랑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검은 머리 희끗희끗 파뿌리처럼 변해가는 사이, 이제 남편은 나를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벗이자 전쟁터에서 함께 살아남은 전우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도 남편이 나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여전히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좋으며 코고는 소리에 밤잠을 설쳐도 한 방에 있고 싶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 다음 주 결혼 기념일에 오래된 부부처럼 갈비탕이나 제육볶음을 먹으러 간들 어떠하리 그와 함께 파뿌리가 되어가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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