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인생
12/23/19  

나는 자타공인 길치에 방향치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금새 눈치를 챌 만큼 나는 전형적인 길치이다.

 

워낙 길 찾는데 자신이 없다 보니 혼자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데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대학생 때 홀로 떠났던 배낭여행 중 손에 분신처럼 꼭 쥐고 다녔던 지도는 거의 무용지물로 분명 지도를 열심히 보면서 걸었는데도 반대로 걷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 이르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행히 늘 나보다 지도를 잘 보는 누군가를 만나 동행하면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서너 번 다녀온 곳도 네비게이션없이 찾아가라면 어리둥절. 늘 다니던 곳도 반대 방향에서 가거나 야간에 가게 되면 연신 뒤를 돌아보며 갸우뚱. 맨날 가던 건물이라도 뒷문으로 나오면 그때부터 멘붕. 지름길인 줄 알고 들어선 골목길이나 샛길은 막다른 골목이거나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남편은 “네가 생각한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가라”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어려서부터 누군가 내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제일 난감 그 자체였다. 그나마 요즘에는 다들 네비게이션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세히 길 설명할 일이 훨씬 줄었지만 말이다. 나 역시 네비게이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고 길치에게 네비란 목숨과 같지만 애석하게도 네비마저 그닥 잘 보는 편이 아니다. 의도치 않게 자주 네비의 지시를 어기다 보니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라는 멘트는 매우 친숙해졌다

 

오늘 볼 일이 있어서 명동에 가게 되었다. 저렴한 주차장을 찾아 주차하고 출구를 찾아 헤매는데 한참. 알고 보니 그 건물은 리모델링을 앞두고 공사중인 건물로 완전히 비었고 출입구가 아예 다 잠긴 상태였다. 결국 1층에 문이란 문들은 다 한번씩 확인한 후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가 나가는 출구로 걸어 올라갔다. 보행금지라는 사인이 있었지만 그 말을 들었다가는 오늘 내로 이 건물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출구를 빠져나와 최종 목적지 건물 출입구를 찾는데 또 한참. 결국 담당자와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한 이후 가까스로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이렇듯 길치로 사는 인생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길 헤맬 것을 대비해서 늘 부지런히 출발했고 혼자 새로운 곳을 찾아가야 할 때면 몇 차례씩 시뮬레이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신경이 곤두섰고 피곤했다. 결국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길치는 타고난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길치 인생에도 나름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데 바로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언젠가 와봤던 길” 같다는 사실이다. 늘 새로운데 언젠가 와봤던 것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꽤나 설레는 일이다.

 

나같은 길치, 방향치,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결국 다 같은 소리임)이 계시다면 반갑습니다. 오늘도 저처럼 헤매셨나요? 가능하면 길치들끼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길치 모임 같은 것을 한다면 꽤나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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