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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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12/30/19  

나의 첫 직장은 가든그로브에 위치한 대형 한인 마켓이었다. 그 전에 비공식적으로 소소한 일들을 하긴 했었지만 나름 직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그곳이 처음이라 할 수 있겠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계산대가 문 앞이라 겨울에는 너무 춥고 계산이 늦어지면 손님들의 원성을 사는 일이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일을 했었다. 일 시작하고 둘째 날이었나, 계산하다가 김치병을 깨는 바람에 정신이 혼비백산했던 적도 있지만 한 달쯤 되니 야채며 과일이며 척 보면 코드 번호와 가격을 줄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매우 다양해서 베테랑 아줌마 캐시어부터 내 또래의 고등학생, 대학을 갓 졸업했을 젊은 청년들도 있었다. 그 중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캐시어가 있었는데 그녀는 유독 나에게만 쌀쌀맞았다. 웃고 있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음기가 싹 사라지곤 해서 처음에는 왜 그런가 싶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어린 직원들은 모두 그녀에게 "언니"나 "누나"와 같은 호칭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그녀를 "아줌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당시 십대였던 나는 도무지 중년 여성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아직 미혼이고 결혼한 사실이 없는 처녀일지라도 도저히 언니라는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아마도 실제로 내게 친언니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오빠"라는 소리보다 어려운 게 "언니"였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고 "언니"라는 말이 입에 붙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언니라고 불리는 것도 내가 불러야 하는 것도 낯설고 편치 않았다. 가족관계나 가족만큼 가까운 지인끼리만 사용되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옷가게 점원들이 보자마자 "언니"라고 부르면 불편하다 못해 거북하기까지 했다. 차 마시러 간 카페에서 동행한 지인들이 주문 받으러 온 우리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직원에게 "언니"라고 하면 그것 또한 이상했었다.

 

그래서 호칭이 애매할 때면 "저기요" "여기요"하곤 했었는데 요즘에는 왠지 저기요가 제일 거리감이 느껴져서 말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도 모르게 불특정 다수에게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호칭을 쓰다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나보다 어린 식당 종업원이나 가게 점원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언니"라고 하고 일하다가 만난 5-60대로 보이는 분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른다. 한국화 되어가는 것인지 나이를 먹는 탓인지 잘 모르겠다.

 

얼마전 백화점에서 이벤트를 진행하게 되어 일주일 정도 백화점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백화점에 고객으로만 가봤지 이런 식으로 백화점을 드나들게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간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20년 넘게 백화점에서 판매직으로 일했다는 50대 후반 직원은 나를 보자마자 언니라고 불렀다. 누가 봐도 나보다 이삼십 년 나이가 들어 보이는 고객들도 대부분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서로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풍경이 그다지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사실 아가씨, 아줌마, 총각, 아저씨,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듣기 좋은 호칭이 딱히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이제 당연히 아줌마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은연중에 “아줌마”보다야 “언니”가 낫지 않겠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낯선 이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이상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싶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 옛날 10대 때 마켓에서 일하다 만났던 그 때 그 분도 그냥 “언니”라고 불러드릴 걸 그랬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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