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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주부들
04/23/18  |  조회:129  

그날 오후도 여느 때처럼 평범하면서도 지루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막내는 낮잠을 자느라 집이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평소 잠깐 여유 시간이 생기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곤 하는데 그날은 딱히 보고싶은 프로그램도 없고 해서 십여 년 전 방영했던 미국 드라마를 찾아 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미국 드라마 중 내가 선택한 작품은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이었다.

 

드라마는 미국 도시 외곽 지역인 위스테리아 가에 사는 매우 이상적인 중산층 주부들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방영 당시 미국 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았으며 특히 미국의 영부인이었던 로라 부시 여사가 백악관 만찬에서 “대통령이 밤에 잠들고 나면 나는 위기의 주부들을 시청한다. 나야말로 위기의 주부다.”라고 말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미국 드라마이기 때문에 한국과는 문화적 정서적 차이가 있겠지만 이 드라마에 나오는 자살, 불륜, 살인, 출생의 비밀 등 각종 막장 소재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극한 막장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위트있는 대사와 캐릭터를 잘 살려낸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고 빠른 내용 전개, 궁금증이 증폭되는 에피소드들은 시청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특히 난생 처음으로 전업주부가 된 나에게  “위기의 주부들” 속 주인공들의 언변과 재치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었다.  

 

고3때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두 달 이상을 쉬어 본 적 없이 늘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넷으로 늘어나는 동안에도 나는 늘 출퇴근하는 생활을 했다. 가끔은 늦잠이나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삶을 동경했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삼삼오오 모여서 브런치 먹는 엄마들을 부러워했고 뚝딱뚝딱 집밥을 만들어내는 주부 9단들을 존경했지만 워킹맘으로서의 내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한국에 오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 공백을 가지며 처음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업주부로 처음 몇 주는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TV 보면서 빨래 개는 것도 즐겁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한 바닥이 깨끗해지면 속이 다 시원했다. 좋아하는 음악 감상하면서 요리를 하거나 설거지하는 것도 재미있고 화장실에 새 수건이나 휴지를 가져다 놓으면 괜히 마음이 든든했다. 칼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렸다가 야식 먹는 것도 신나고 하루종일 일하느라 고단했을 남편의 시중을 드는 일도 퍽 행복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에 서서히 위기가 찾아왔다.

 

하루 하루가 지나칠 정도로 단조로웠다. 매일 가장 큰 관심사는 아이들 스케줄과 삼시세끼 뭐 해 먹을까였으며 딱히 외출할 일도 없어서 점차 사회로부터 단절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아이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대화할 일도 없다보니 사용하는 단어가 한정적이라 어휘 구사력은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취침 시간 다 되어 돌아오는 남편의 근무 스케줄 탓에 주말 부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가장 큰 시련은 이런 생활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막장 미국 드라마도 우리네 이야기와 비슷했다. “위기의 주부들” 속 네 명의 주부 모두 현재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이상은 있지만 나 자신보다 가족이 우선이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가치관은 변하지 않는다. 음주운전 뺑소니 범죄를 저지른 아들의 죄를 은폐하고 사고로 사람을 죽인 남편을 은닉하고 별거 중인 남편의 애인을 경계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선택은 언제나 보수적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수입원이 안정적인 남편 곁에서 안도하고 자식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곧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겪는 각기 다른 사연들은 현실과 다르게 몹시 극대화 되어 있긴 하지만 세상 모든 주부가 저마다의 절박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일반 주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메인 카피인 ''누구나 더러운 빨랫감을 조금씩은 지니고 있다(Everyone Has a Little Dirty Laundry)'' 즉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비밀이 없는 인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처럼 말이다.

 

 “위기의 주부들”이 마지막 에피소드를 향해 가는 오늘, 세상 모든 절실한 주부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길 응원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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