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
01/21/20  

이웃 언니와 차 한 잔 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를 중학교에 보낸 주변 엄마들이 모두 재취업하기 위해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쯤 되면 학교와 학원 다니느라 집에 머무는 시간도 없고 상대적으로 나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어떤 일자리든 반찬값이라도 벌러 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전업맘 3년 차, 나도 이제 슬슬 풀타임으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잠이 안 오던 어느 밤에 구직 앱의 이력서를 활성화시켰다. 여유는 전혀 없지만 당장 손가락 빨게 생긴 것은 아니니 내가 원한다면 전업맘으로서의 삶을 더 유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육아봇이나 밥순이, 집안 식구들의 매니저가 아닌 주체적인 나로서 살아가고 싶어졌다. 남편의 이름에 종속되어 경제생활을 꾸려가야만 하는 "주부"라는 직업이 얼마나 구차하고 처량한지 자주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봄의 가치는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중요하지만 정작 그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은 잉여가 되는 세상이 아닌가…… 전업맘은 집에서 노는 사람, 능력 없는 여자들이 선택한 포지션이라는 우리 사회가 심어놓은 무언의 프레임은 분명 존재했다. 아무리 남편이 진심으로 “가정을 위해 애써주어서 고맙다”고 내게 말해주어도 사실 언제나 뭔가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엄마 오늘은 뭐 했어?" 라고 했을 때 "회사 가서 일했어"라고 말하면 간단히 끝날 것을 "집에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너희들 챙기고…..."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뭔가 부족한 것만 같아 슬펐다.

 

그래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즉흥적인 기분으로 올린 이력서로 운 좋게 취업이 되었다. 경단녀이긴 했지만 이중언어 구사가 가능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의 이력들을 경력으로 인정해 준 회사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집에서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있고 전부터 해보고 싶은 직종으로 곧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주위에 뛰어난 재능을 두고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단녀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직장을 선택할 때도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가정생활과 양립 가능한 근무 여건인지가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꿈을 찾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지금 상황에 맞춰 새로운 일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경단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인 명문대 출신의 경단녀 A는 차라리 집 근처 빵집이나 마트에서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게 속 편할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학벌이며 경력이 아깝지도 않냐고 물었더니 살다 보니 여자에게 그런 것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그래도 꼭 풀타임 정규직으로 취업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기왕이면 강남 테헤란로 길에 있는 사원증과 명함을 주는 회사로 가고 싶다고도 했다. 묘하게 공감이 가면서 씁쓸했다.

 

엄마로 사는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가지만 정작 내 자신은 그 바삐 흘러가는 세상 한가운데 멈춰있는 것만 같아 겁이 났다. 하지만 멈춰봐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나에게 “애엄마”, "애넷맘"이라는 타이틀은 내 발목을 잡는 늪이 아닌 내 최고의 경력이며 이력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자의든 타의든 경단녀가 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전한다.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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